대파를 사랑한다. 늘씬하게 뻗은 몸과. 뾰족하지만 낭창낭창한 초록 잎과. 매끈하지만 단단한 하얀 줄기와. 땅속에 묻혀 가닥가닥 흙이 붙은 뿌리까지도.
대파는 나서지 않는다. 얌전히 자기의 차례를 기다릴 뿐이다. 탕의 육수로. 나물의 양념으로. 볶음의 고명으로. 메인의 맨 앞에서 오래도록 끓여지거나 중간쯤에서 한데 무쳐지거나, 맨 뒤에서 조용히 올려진다. 제 모습을 보이지 않고도 음식에 깔끔한 맛을 더하고, 고작 반큰술 넣었을 뿐인데 맛을 한층 끌어올리며, 몸의 아주 일부를 보이고도 음식을 맛깔스럽게 한다. 파는 만년 조연. 어쩌면 엑스트라에 가까울 채소다.
그러나 대파에게도 주연인 날이 있으니 대파전, 대파구이, 대파무침, 대파김치로 식탁에 오를 때가 그렇다. 근래엔 대파크림치즈가 핫하다. 사람들은 일찍이 대파만의 고유한 맛을 모르지 않았다. 달면서도 맵싸하고 깔끔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대파는 자체로 대체 불가다. 대파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양파가 쓰이면 맛이 이상해진다.
일생이 만년 조연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삶이란 그런 게 아니었다. 양념과 고명과 육수로 쓰여도 대파는 대파. 대파전과 대파구이와 대파무침과 대파김치로 만들어져도 대파는 대파. 다르게 쓰인다고 대파가 대파가 아닌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