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다고 말해지는 것을 떠올려 본다. 이를테면 외할아버지의 노란 마고자에 달린 타원형 주황 호박 단추 같은 것.
외할아버지는 초로의 나이까지 나주에서 농사꾼으로 살다 큰딸이 있는 수원으로 이촌향도하셨다. 머리칼이 까맸지만 외할머니처럼 늘 한복 차림이셨다. 매원 국민학교 왼쪽으로, 중앙 기독 초등학교가 들어서기 전까지 근처 노는 땅에 옥수수, 콩, 고추, 깻잎, 상추 등을 심고 가꾸셨다. 추석에 친척들이 다 모여도, 곡식들 잘 크는지 보러 간다고 짧지 않은 거리를 꼭 다녀오셨다. 댁에서도, 출타하실 때도 늘 미색 한복에 노란 마고자를 입으셨다. 15도쯤 굽은 등 뒤로 뒷짐을 지고 잰걸음을 하셨다. 걸을 때마다 호박 단추가 마고자 위에서 영롱하게 일렁거렸다. 외할아버지는 시조를 잘하셨다. 댁에서 쉴 때면 '덩 국 국 떡 떡- 구궁 국 국 떡 떡-' 멋드러지게 장구를 치며 시조창을 했다. 때때로 "청사아아아아ㄴ리이이이 벽계에에에에에에 수우우우우우우우 야아아아아아~" 평시조를 뽑으셨다. 그러면 어김없이 외할머니의 호통이 떨어졌다. "옜소, 예? 여그 사람들은 싫어헌다고 안 허요? 시끄런께 고만허쇼, 예?" 할아버지는 싱거운 웃음 한 번 짓고 장구를 방 한쪽에 세워 두셨다.
"금자동아 은자동아 금을 준들 너를 사랴 은을 준들 너를 사랴
나라에는 충신둥이 부모에게 효자둥이 일가친척 화목둥이 동네방네 위엄둥이"
외할아버지 무릎에 누우면 머리를 쓸며 자장가를 불러 주셨다. 자장가라기보다 민요 같았다. 그런데도 규칙적인 4, 4조에 금세 잠이 왔다.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이 이마를 지났다. 이랑처럼 불거진 할아버지의 손가락은 신기하게도 부드러웠다.
유난히 눈이 맑았다. 회색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총명했고 아는 게 많았고 시조를 잘했고 근면했다. 할아버지가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 밭에서 딴 채소로 할머니가 무침을 하고 전을 부쳐 밥상을 차리면 " 여간 맛나다아." 노래하듯 말씀하셨다.
1917년 구한말에 태어나 왜정과 6.25를 겪은, 어쩌면 대한민국의 최고 격동기를 살아 냈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10여 년의 시간 동안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외할머니가 싫은 소리를 하면 "나주떡은 왜 그른가?" 하며 허허허 웃기만 하셨다. 장수의 복은 탔으나 스물아홉 막내아들을 허망하게 잃었다. 눈이 깊고, 볼이 폭 들어가도록 크고 예쁘게 웃던 외할아버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0년을 살고 가신 우리 외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그토록 남의 땅에 종자를 심고 물을 주고 풀을 뽑으며 풍성하게 밭을 일구었던 건 어쩌면 작은외삼촌에 대한 그리움을 한 해 한 해, 농사로 달래셨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봉밥을 드시고 그의 열 배도 넘게 땀을 흘리시던 외할아버지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아하다는 말을 알기 전부터 나는 이미 외할아버지를 보고 우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한복과 댓돌에 놓인 하얀 남자 고무신. 맥고 중절모자와 우산 손잡이 모양의 갈색 지팡이. 많이 쳐서 긁힘 자국이 숱한 장구와 북. 할아버지의 자장가와 낭랑한 국민 교육 헌장 낭독 소리. 전국 노래 자랑에서 인기상을 안겨 준 시조창까지. 우아하다는 것은 외형적으로만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기품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주 어릴 때라 선명하진 않지만 나주 외갓집은 영산강의 둑방을 지나야 나왔다. 불빛 없는 컴컴한 대숲. 바람 소리와 깜깜한 사위가 나를 집어삼킬 거 같았다. 그럴수록 있는 힘껏 두 눈을 꽉 감았다.
한여름 외갓집엔 닭과 오리가 마당을 왔다 갔다 했다. 나는 대문 앞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채 엉엉 울었다. 외할아버지는 나를 번쩍 안고 마루에 올려 주셨다. 따뜻한 눈맞춤에 무서움이 사르르 녹았다.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2016년 10월 4일 점심 시간, 소파에서 설핏 잠이 들었다. 외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셨다. 언제나처럼 미색 한복에 주황 호박 단추 차림으로. 나를 보고 말없이 웃으셨다.
그날, 외할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1004. 날짜처럼 천사가 되어 작은외삼촌과 외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훨훨 날아가셨다.
할아버지는 가는 날까지 우아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