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는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UCI) 도서관 5층에는 엘리베이터 앞에 작은 전시공간이 있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교수나 직원으로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한 학기만 공부하는 늙은 학생이다. (여기서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Faculty(교수진)냐고 먼저 묻는다^^) 얼마 전에 우연히 이 전시를 발견하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바로 '범죄와 논쟁(Crime and Controversy)'이라는 제목의 전시였고 '오렌지 카운티에서 범죄가 변화하는 모습'이라는 부제가 달려있었다. David Antonio Palacios란 분과 대학생 역사 인턴들이 함께 구성해 놓았다. 학생들을 참여시켰다는 게 좋아 보였다. 우리 대학 내의 전시에서도 학생들을 참여시키면 보수와 경험도 제공하고 학생들의 애교심을 높일 수도 있을 것이다.
<범죄와 논쟁> 전시 포스터
전시는 당시의 중범죄였던 말 도둑을 교수형 시키는 그림으로 시작한다. 말을 훔쳤다고 공공장소에서 교수형을 시키다니. 무법천지가 되기 쉬운 서부개척 시대에 매우 엄격한 법집행을 통해 본보기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교수형을, 그것도 많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행한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밀도둑 등 범죄자를 교수형시키는 그림
말 도둑을 교수형 시키는 무자비한 법집행으로 시작한 전시는 이후 차별과 혐오의 범죄를 다루었는데, 내가 살고 있는 오렌지 카운티의 역사를 통해 바라본 것이라 더 실감 나게 와닿았다. 아래의 1876년 7월 22일 자 산타 애나 밸리 뉴스에는 말 도둑과 강도에 관한 기사가 있다. 1870년대에 지금 내가 사는 산타애나에는 말 도둑이 기승을 부렸던 것 같다. 아래의 첫 번째 기사를 보면 '산타애나 몇 마일 반경 안에서 지난 열흘 동안 6마리 이상이 안장과 마구 등과 함께 도난당했다. 이 악당들에게 도움이 될 로프와 나무를 인근에서 찾지 못하도록 할 수 없을까 '라고 쓰여있다. 두 번째 기사는 Pleasant라는 이름의 가족 세명이 강도를 만나 총격전을 벌였고, 서로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는데, 도망친 강도는 산 쿠엔틴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876년 7월 22일 자 산타 애나 밸리 뉴스 신문 기사
서부 개척시대의 범죄와 가혹한 형벌을 다룬 전시는, 다음으로 차별과 혐오의 역사를 다루었다. 아래의 자료는 1923년에 KKK 단 가입을 독려하는 글과 지원서이다. 자신들을 진짜 미국인(Real American)이라고 지칭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가입하라고 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생각, 국가에 대한 충성, 연설과 언론의 자유, 심지어 여성들에 대한 보호까지 언급한 것만을 보면, 기독교 기반의 민주주의 애국 페미니즘 단체처럼 보인다.
- 신을 믿으며 기독교의 교리를 믿는가?
- 불멸과 정의의 원칙에 기반하지 않은 교회는 신과 인간에게 조롱이라는 것을 믿는가?
- 어떠한 외국 정부, 황제, 왕, 교황 또는 어떤 외국의 정치적이나 종교적인 힘에 충성하지 않을 것인가?
- 신 다음으로 성조기에 대해 충성하는가?
- 연설과 언론의 자유를 믿는가?
- 법과 질서를 믿는가?
- 순수한 여성들에 대한 보호를 믿는가?
하지만 그들의 진심은 아래쪽의 질문들에 있는 것 같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들을 포함한 외국인 이민자들은 제한되어야 하며 파업도 해서는 안되고, 무엇보다도, 백인들의 권리가 다른 어떤 이민자들의 권리보다 우월함을 강조하고 있다.
- 군중 폭력의 원인을 예방하기 위한 법률의 제정을 믿는가?
- 자본과 노동의 가까운 관계를 믿는가?
- 외국인 노동자 선동가들의 부당한 파업의 금지를 믿는가?
- 외국인 이민자들에 대한 제한을 믿는가?
- 이 나라에서 당신의 권리가 외국인들의 권리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믿는가?
이 질문들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인물은 바로 트럼프였다. 이민자를 비하하고 차별하는 트럼프 같은 인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거의 연임까지 될 뻔한 것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있었던 일들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비록 인종차별과 폭력으로 악명 높은 KKK단은 최소한 공개활동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이 땅 미국은 백인들의 땅이며 외국인 이민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갉아먹고 있다는 차별과 혐오의 인식은 21세기 지금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 같다.
KKK단 애너하임 지부의 가입 홍보문과 가입 원서(1923년)
애너하임에서 KKK단이 공공연히 얼굴을 드러낸채 행사를 홍보하는 모습(좌)과 십자가에 불을 붙이고 야간 집회를 하는 모습(우)
다음으로 본 것은 자신들의 교회와 애너하임 시민사회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간섭과 Myers 목사를 쫓아내려는 시도에 저항하자는 1925년의 전단지였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가톨릭 교회가 애너하임의 Myers라는 목사(신부가 아니고 목사, 즉 Reverend라고 되어있어 조금 의아하다)를 쫓아내려 하는 데, 몇몇 상인들과 결탁하고 언론사를 통제하려는 로마 가톨릭에 대해 Meyers 목사가 문제를 제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쫓아내려는 Meyers 목사를 지키기 위해 모이자는 전단지(1925년)
다음 전시물은 사상에 대한 차별과 탄압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1969년에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라는 흑인 여성이 UCI에 와서 강연을 했다. 안젤라 데이비스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대학을 졸업한 정치 활동가이자 학자로 미국 공산당(Communist Party USA, CPUSA)의 오랜 당원이며 마르크스 주의자이다. 그는 또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위한 협력 위원회(Committees of Correspondence for Democracy and Socialism, CCDS)의 설립 멤버였다. 그가 44년생이니 78세이신 우리 어머니와 동갑인데, 당시 26살에 불과한 그녀의 강연이 이렇게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을 보면 젊은 나이 때부터 꽤 유명했던 것 같다.
미국의 유명한 마르크스 주의자 안젤라 데이비스의 UCI 대학 강연(1969년)
당시 많은 주민과 졸업생들이 당시 Aldrich 총장 앞으로 전보와 편지를 보내어 '공산주의자'가 학교에 와서 강연하는 것을 반대했다. 아래에 보는 것처럼, 이런 전보와 편지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많은 항의가 빗발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뉴포트 비치에 사는 제임스라는 사람은 총장 앞으로 전보를 보내어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당신이, 이미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사람이 우리 주립 대학에서 가르치거나 강연하는 것을 허락하고 용납하는 것은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총장에게 온 항의 전보(1969.10.10)
또 애너하임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한 사람은 두 장을 타자로 빼곡히 친 장문의 편지를 총장 앞으로 보냈다.
편지는 "산타 애나에서 당신이 강연할 때 안젤라 데이비스를 옹호하는 것에 꽤 흥미 있었다"라고 시작했다. 자신을 버클리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 소개한 그는 '순진해 빠진 당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로 시작해서, '자신이 정치 과학을 전공했을 때 공산주의와 관련한 많은 수업을 들었으며 자신이 생각하기로는 공산주의자들은 그저 우리는 이런저런 것을 할 생각이다라고 사람들에게 얘기할 뿐이어서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믿게 한다'라고 했다.
그는 안젤라 데이비스가 '나는 공산주의자이며 학생들에게 공산주의를 가르칠 것이다. 어떤 형태의 사회적 합의만이 이 나라에서 인종차별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믿는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며, 그녀가 학생들에게 그녀의 생각을 주입시킬 거라고 경고한다. 그는 안젤라 데이비스의 강연 내용이 이 나라를 파괴시키는 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21세기인 지금에 바뀌었을까? 내 생각에 별 다르지 않다고 본다.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를 가지고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하고 범죄시 하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여전히 마찬가지인 것 같다.
참고로 안젤라 데이비스는 현재까지, 위험한 사상을 학생들에게 전파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계급, 여성주의, 인종차별과 미국의 교도소 체계에 관한 십여 권의 책을 쓰고 교수로서 평화롭게 활동하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대 초 미국 레이건 정부 때에는 국무부에서 동유럽 국제 외교 특별 비서관으로 정부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
안젤라 데이비스 강연을 반대하는 한 교사의 편지(1969.10.16)
다음으로 본 것은, 1970년대에 산타 애나에서 지역 활동리더로 활동했던 프랭크 셔포드(Frank Shuford)의 석방 운동에 관한 자료들이었다. 수백 명의 젊은이들에게 먹을 것과 옷, 그리고 상담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던 23세의 프랭크 셔포드는 이 공로로 산타 애나 시장에게 칭찬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살인 미수죄로 붙잡혀 30년형을 선고받았는데, 그는 무죄이고 희생양이며 이 사건은 '전적으로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이 담긴 자료였다. 자료는 그가 감옥에 간 후 활동가가 없어져서 지역에는 다시 마약 헤로인이 나돌고 있다고 했다.
1972년 2월 2일, 세 명의 범인이 편의점 가게 점원 2명에게 총을 쏴서 중상을 입힌 날, 프랭크는 가족, 친구들과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재판에서 물리적 증거는 제출되지 않았으며, 다친 두 명의 점원중 한 명만이 프랭크를 지목했으며, 그를 지목한 점원은 프랭크가 그 가게의 단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날 처음 봤다고 위증을 했다고 한다. 경찰은 세명의 목격자가 더 있다고 했지만 그들을 한 번도 재판에 출석시키지 않았다. 2심 재판 전에 유죄를 인정하면 5년으로 감형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프랭크는 거부했고 결국 2심에서 30년 형을 받았다고 한다. 프랭크는 "내가 노동자 공동체를 조직했기 때문에 자본가들이 나를 감옥에 보냈다."라고 했다.
프랭크 셔포드 석방 운동 소식지
그의 재판은 편파적으로 이루어졌다. 배심원들은 모두 백인이었으며 검사는 그를 '혁명적인 문제아'로 불렀고, 그가 예전에 그를 깜둥이(Nigger)라고 부른 학교 교장을 때렸던 사건을 들추어내기도 했다. 또한 사건에 관한 어떤 정보를 입수한 사람들이 지역 검사(D.A, District Attorney)에게 실제 총을 쏜 사람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을 때, 그 용의자들은 경찰에서 조사를 받은 후 재빨리 타운을 떠났다고 한다. 1976년에 지역사회에서는 대대적으로 그의 석방운동을 펼쳤다.
그가 1972년 한 고등학교에서 주도한 행진(왼쪽 아래), 1976년 산타 애나에서 열린 석방운동 (위쪽과 중간의 작은 사진), 감옥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면회하는 모습(1978)
90년대에도 아시안에 대한 혐오의 시선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도 있었다. 바로 당시 경찰이 배포한 '아시안 갱' 구별법과 그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문들이다. 경찰이 제시한 판별법은 지금 보면 어이가 없다. 문신을 했고, 신발은 'Vans'테니스화를, 야구모자를 거꾸로 쓴다는 따위의 기준이다. 물론 총을 가지고 다닌다는 내용도 있다.
당시 경찰이 배포한 아시안 갱 구별법(좌)과 베트남어로 된 아시안 갱 대응 팜플렛(우)
1993년에는 경찰이 아시아계 청년들을 갱 용의자로 간주하고 체포나 허가 없이 사진을 찍는 것이 시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하며 저항하며 시 위원회에 청원을 함께 하자는 운동이 산타 애나 인근의 파운틴 밸리에서 있었다. "Stop Asian Mug-Book" 범죄자들의 사진을 찍어서 모아 놓은 것을 Mug book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범죄자들이 체포될 때 찍고 증언 시에 사용된다. 그런데 아무런 허가나 체포의 행위 없이 길거리에서 '갱처럼 보이는' 아시안 청년들의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 전시를 보며 느낀 것은,
미국에서 혐오와 차별은 예전부터 존재했고 최근의 'Black lives matter'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혐오와 차별이 있는 곳에는 저항과 투쟁이 있어왔다. 그런 기나긴 저항과 투쟁의 역사가 예전보다는 더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지금의 사회를 만들었을 것이다.
트럼프는 갑자기 등장해서 백인 서민층의 지지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뿌리 깊은 차별과 혐오의 역사가 숨어있다.
우연히 학교 안에서 이 기획전시를 발견하고 옛 사진과 자료들을 읽으며, 나는 무척 흥미 있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우리 동네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 미국의 인권과 차별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이런 교육적으로 훌륭한 전시를 혼자 보기가 아까웠다. 그래서 내가 보고 이해한 것을 욱이에게 설명해주고 싶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우리는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욱이에게 잠시 시간을 내주면 좋은 전시를 설명해 주겠다고 하여 같이 전시공간으로 갔다. 욱이는 마지못해 따라왔지만, 나는 그가 자료를 보고 설명을 들으면 재미있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 도둑을 교수형 시키는 얘기로 시작해서 KKK단 얘기로 신나게 넘어가려는데 욱이가 말했다.
"그만 가시죠."
"왜, 재미없어?"
"이건 아빠가 관심 있는 거지, 전 관심 없어요."
헉, 어떻게 우리 동네의 KKK단 얘기에 관심이 없을 수 있다는 말인가. 조금 더 얘기를 듣다 보면 흥미를 갖겠지 생각했다.
"아빠에게 5분도 시간을 못 내주니?"
"아빠 얘기 알겠고요. 저는 괜찮다고요. 가시죠."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나는 말했다.
"알았다. 가자."
인정한다. 누군가에겐 흥미로운 얘기가 다른 이에겐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억울하다. 나는 적어도 욱이가 유럽 축구리그에서 누가 어디로 이적했다는 얘기를 하거나, 프로게이머들이 연봉 얼마를 받는다는 얘기를 꺼내도 비록 나의 관심사항은 아니지만 들어주고 반응해준다. 가끔은 대화 소재로서 내가 먼저 인터넷에서 본 축구나 게임 얘기를 꺼내기도 한다. 아무리 정치와 인권에 별 관심 없는 MZ세대라고 하더라도 아빠가 그렇게 까지 열의를 보이며 설명을 하려는데 관심 없다고 잘라버리다니. 집에 오는 내내 나도 욱이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약간의 내상을 입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욱이가 그렇게 예의 없는 아이는 아닌데, 왜 그런 거부반응을 보였을까?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욱이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좀 설파하는 편이긴 하다. 일상적인 얘기를 하다가도 결론은 무엇인가 의미 있는 교훈을 주려고 한다. 이제 성인이 된 욱이에게 나의 이런 '목적의식적인 훈육의 마인드'가 거부감을 주는 것이 아닐까. 자연스럽게 이러이러한 좋은 기획전시가 있는데 아빠가 봤더니 재미있더라, 하며 은근슬쩍 권하는 정도면 좋았을 것이다. 정 본인이 관심 없다고 하면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나는 말을 물가로 이끌려고 하는 것을 넘어 물을 먹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욱이는 비단 오늘의 일 때문에 거부감을 보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청소년기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그런 나의 훈육 마인드에 반감이 쌓였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내가 욱이에게 한 행동은 문제가 없고 욱이의 행동은 좀 예의에 벗어났다. 하지만 수면 아래 잠긴 그의 반감을 이해하기로 했다.
말에게 억지로 물을 먹일 방법은 없다. 말이 목마를 때 좋은 샘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