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파술, 소크라테스 문답법
소크라테스의 아버지는 조각가였고, 어머니는 산파였다.
숨겨진 것을 끌어내는 공통점이 있다.
소크라테스 문답법도 마찬가지다. 토론과 논박을 통해 진리를 끄집어내는 기술을 발휘한다. 중요한 건 진리는 자신이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조각가가 대리석을 품고 있지 않고, 산파가 아기를 품고 있지 않고, 다른 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끄집어 낸다는 점에서, 진리는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나의 바깥에 존재한다.
“진리는 내 안에 있어”
이 말을 소크라테스가 듣는다면 오만하다고 생각하며 의심할 것이다. 그리고 물어볼 것이다. “자네 안에 있다면 보여줄 수도 있는가? 보여줄 수 없다면 안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랑은 어디 있을까.
사랑은 내 안에 있는 것일까? 사랑이 내 안에 있다면 왜 우리는 그토록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 사랑이 바깥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언제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일까.
우리는 소크라테스처럼 질문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답을 아는 자가 아니었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메는 사랑은 내 안일까, 내 바깥일까. 우리가 물었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는 문답을 통해 진리를 들어내는 걸 산파술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사랑이 어디인지를 묻기 전에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사랑이 무엇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려운 게 있다. 아끼고 소중히 하는 마음이라고 말하자니, 부모를 사랑하는 것과 연인을 사랑하는 것,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 모두 다 다른 양태이고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철학이 어려운 이유는 본질에 대답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질문만 맴돌기 때문이다. 사랑과 철학은 닮았다. 어쩌면 사랑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일지 모른다. 얼마큼 사랑하는지, 왜 사랑하는지, 정말로 사랑하는지 끊임없이 묻는 이유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건네기 위해서 물어본다. 대답은 이미 묻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알고 있는 대답이다.
긍정이면 다음에 또 물어보고, 부정이면 영영 묻지 않는 사이가 된다. 오직 사랑한다는 대답이 나올 때 질문은 되풀이된다.
질문은 심연을 파고들며 소용돌이처럼 맴돌게 된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지, 사랑은 무엇인지, 사랑이 얼마만큼인지, 오늘 물어보고 내일 물어본다. 사랑은 절대성과 상대성을 오가며 점점 뭔지 모를 복잡함으로 가게 된다. 열정과 권태 사이를 지나 연인은 고난을 겪는 관계가 되고, 기쁨인지, 괴로움인지 모를 애증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바깥에 존재할까?
관계를 나아가기 위해 두 사람이 사랑을 이어간다면 사랑은 결코 어느 한 쪽에 속해 있을 수 없는 거다.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에만 사랑이 존재하고, 사랑은 서로 아끼고, 표현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 가만히 있다면 사랑하는지 알 수 없다. 사랑이 그 자체로 내부에 있다면 아무 행동하지 않을 때도 알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랑은 바깥에 있기에 서로 손을 맞잡으며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거라고 볼 수 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랑은 없다. 사랑이 완전하다면 관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필요 없을 것이다. 서로 간에 완전한 사랑은 이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은 안에 존재할까?
감정은 본질적으로 우리 내부에 존재한다. 사랑에 빠지는 건 뇌가 하는 일이다.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일, 마음이 바깥에 있다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속임수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더 마음을 잘 숨기는 걸 보면 사랑 역시 마찬가지로 안에 있을 수 있다.
사랑이 안팎에 있을까. 바깥을 가리키는 쪽은 관계를 말하고, 안에 있는 사람은 감정을 말하고 있어 서로 다른 걸 지칭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사랑이 관계인지 감정인지를 정의내리지 못한다면 이 물음은 끝없이 맴돌거라 생각한다.
소크라테스형, 사랑이 너무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