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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강자만 누릴 수 있는 걸까?

트라시마코스와 니체

by 비평교실

트라시마코스는 법은 강자의 이익이라 말한다.


정의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강자가 어떻게 말하냐에 따라 달려 있다는 식이다. 오늘날에도 영국은 승리했기 때문에 욕을 덜 먹고 독일은 패배했기 때문에 욕을 더 먹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화 원피스에서는 도플라밍고가 “강자만이 정의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고의 원조는 고대 그리스 트라시마코스적인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도 강자들을 위한 것일까?


사랑 역시 강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충분히 주장할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사회에서는 돈이 많고, 권력과 외모가 출중할수록 연애를 많이 하고, 사랑도 많이 경험하기 때문이다. 자본은 돈만 가리키는 게 아니다. 사회적 자본은 외모, 화술, 직업 등이 사회적 강자 쪽에 속할수록 우월감을 느끼고, 인기가 많기 때문이다.

인기가 많은 게 잘못이 아니라, 인기 없는 자들의 소외감을 해소할 곳이 존재하지 않는 게 문제다. 서양에서는 인셀 문제로 영국에서는 외로움 부서가 생겨났고, 한국 연애 ‘시장’도 녹록지 않다. 지난 연재 때도 말했듯이 SNS와 연애 프로는 올바른 연애 대상을 만들어냈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사람은 올바르지 못한 연애를 하는 거처럼 느끼도록 만들었다.


올바른 연애의 기준은 강자와 사회적 자본의 영역이기도 하다. 연애 시장에서 남녀 사이는 애매해졌다. 객관적으로 수치화하여 누가 손해를 보는 연애인지를 고려하게 만든다. 그동안 연애 시장과 결혼 방식은 역사적으로 남성이 유리했지만, 이제는 남성도 분리되어 버려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지 쉽게 말하기 어려워졌다. 사회 구조는 은폐되었고, 갈등은 가시화되었다.


현대 사회는 트라시마코스가 내린 결론과 반대가 흘러가는 듯 보인다. 실질적 강자와 형식적 강자가 분리된 듯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도 가해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갑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모든 강자는 형식적 강자다. 실질적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상대방이 주도권을 감추고 있다고 말한다. 폭로는 존재하지만, 실체 없는 내용이 공허하게 떠돌 뿐이다. 책임과 의무를 상대편에게 떠넘기고 그동안에 입은 피해에 대해 보상할 것을 상대에게 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상은 절대로 영원히 치유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이제 교환 행위가 되었다. 교환이 정당하지 않을 뿐이다. 객관적으로 수치화되지 못한 헌신은 측정할 수 없기에 입증하지 못하면 없는 일과 다르지 않다. 오직 객관적인 사랑만이 교환될 수 있다. 그 속에서 누가 손해를 보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분명한 건 이익을 보고 있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헌신과 소비는 낭비이며 피해당하는 행위로 전락한다.


니체는 모든 생명체가 힘의 의지를 추구한다고 보았다. 더 강해지려는 욕구, 더 나아지려는 욕구, 자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니체가 보았을 때 현대 사회도, 현대적 사랑도 몰락하는 말세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모두가 약자를 자처하고 어떻게든 약해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강자가 되기 위한 인내 없이는 진정한 사랑을 쟁취할 수 없다. 사랑은 한 사람의 헌신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내와 단련이 사랑을 점점 더 강인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은 강자들이 많이 누리긴 하지만, 일견 다행인 건 강자만이 사랑을 누리라는 법은 없다. 약자들에게는 비록 강자보다 고난이 많을지라도 사랑을 누릴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이전에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


강자는 사회적으로, 객관화시켜 말할 수 없다. 강자는 독립하고 인내하고 단련하고 극복하는 자다. 진정한 강자는 형식적 강자보다 더 많은 사랑을 누릴 수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현재를 사랑하는 강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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