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왜 세 개일까
사랑의 가장 큰 라이벌은 나 자신이다.
그녀 앞에서 나는 나를 제어한다. 손잡고 싶고, 팔짱을 끼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아직 그런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손잡고 팔짱을 끼며 거리를 걷고 싶은 내 욕구는 다른 이성으로 억눌린다. 그 억눌린 욕구는 탈출구를 원한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예술이다.
나는 그녀에게 거절당한 후 철학에 빠졌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면 노래를 부르거나 작사 작곡을 했을 거다.
예술은 고통이다. 예술은 사랑을 말한다. 영화와 음악이 사랑을 말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순히 많이 팔기 위해서 사랑을 말한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소비하지도 않았을 거다. 누구나가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고통은 예술을 부르는 원천이다.
아프로디테와 헤파이스토스는 공식적인 부부 관계지만, 아프로디테가 사랑한 신은 아레스였다.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사이에서 나온 신이 사랑의 신 에로스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알고 있었다. 창조와 아름다움이 결합하려면 전쟁이 필요하다.
사랑은 전쟁이고 그 안에서 창조가 탄생한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다.
첫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과 나 사이의 전쟁이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갈등한다. 그래서 혼자는 외롭고 둘은 괴롭다. 갈등이 일어나면 그때부터 끝장을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럴수록 문제는 복잡해진다.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창조가 필요하지만,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갈등을 야기한다.
두 번째는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물을 사주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 노력이 기쁨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싸움에서 승리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그 노력이 점점 힘들어질 때면 자신과 승부를 펼쳐야 한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한 그녀와 손잡고 걷고 싶을 때 아직 사귀는 단계가 아니라면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잡고 싶지만 잡지 말을까. 혹은 모르는 척 잡아버릴까.
사랑은 공식적일 때보다 비공식적일 때 자기 자신을 더 흥분시킨다. 이른바 썸 단계다. 아프로디테와 아레스가 서로를 더욱 긴장하게 만든다. 사랑이 등장한 후 헤파이스토스라는 대장장이의 신이 나타난다. 모든 긴장이 끝났을 때 서로를 유지하게 만드는 공식적인 힘은 ‘서로를 만들어감’에 있다. 서로를 다시 부수고 냉정하게 식힌 후 다시 두드리는 작업을 통해 재결합한다.
나 자신도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이리저리 재보며 두들겨지고 부서지고 다시 단단해진다. 단단한 자아는 단단한 철학으로 이어진다. 사랑이 점점 단단해지는 이유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비롯된다.
내 사랑도 아름다움과 전쟁과 대장장이가 깃들어 있다.
평범한 감정에는 어떠한 생성도 없다.
오직 예술적 사랑만이 아름다움을 산산조각 내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때 비로소 예술이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