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의 원소는 이것.
사랑의 원소가 있을까?
호르몬일까. 영혼일까. 실체 없음일까. 전기적 화학적 반응일까. 본능일까.
애초에 왜 이런 생각을 해야 할까? 사랑의 원소를 왜 생각하게 되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고통 때문이다.
인간은 고통을 견딜 수 있다. 의미가 있다면.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고통 그 자체보다 고통이 주는 무의미함이다. 의미 있는 고통은 견딜만하다. 아니 의미를 위해 죽을 수 있다.
사랑의 원소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당신은 고통에 사로잡혀 있을 거다. 수학을 잘하는 학생은 수학을 왜 할까? 묻지 않는다. 수학이 고통스러울 때 학생은 말한다.
“사칙연산만 할 줄 알면 되지 왜 미적분까지 알아야 해.”
학생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호기심에 하는 말이 아니다.
하기 싫은데 나에게 억지로 주어질 때, 왜 해야 하는지 묻는 거다. 하기 싫단 거다.
수학 때문에 고통에 빠질 상황이 없었다면 물어볼 일도 없었을 거다.
마찬가지다. 인생에 고통이 없었다면, 아니, 의미 없는 고통에 빠지지 않았다면.
‘인생의 고통? 피하면 되지’
라고 생각했다면 세상의 근원을 규정지을 필요도 없었을 거다.
세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질문 자체가 고통의 마주침이다.
답은 무엇인가? 고대 철학자는 여러가지 답을 내렸다.
불이다. 물이다. 공기다. 원소다. 일자다. 수(數)다. 어쩌면 혹시 사랑인가?
무엇을 대답하건 간에 그리스 철학자들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의미를 부여한 방식대로 세상을 해석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랑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소’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속성을 들여다보자. 외면과 내면으로 나뉠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의 전체적인 외면을 사랑하는 것이지 부분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유별나게 좋아하는 신체 부위는 있을 수 있지만 부분만 떼어놓고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쉽게 사그라들 것이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소라고 부를 수 없다.
사랑을 쪼갤 수 없는 원소로 정의한 이상 내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격도 화낼 때와 웃을 때로 나눌 수 있다. 화내는 모습마저 사랑할 수 있고, 뗴쓰는 모습마저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지칠 때가 되면 고통이 도래한다. 그런 모습을 사랑하는 건 쉽지 않다. 성격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이런 식으로 나누다 보면 결국 사랑은 그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을 좋아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사람의 특정 부분이 아니라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무언가를 좋아한다.
철학하는 모습이나, 독서하는 모습, 춤추고 음악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그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고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할 때 어쩌면 단지 겉모습에 빠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진정 그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매력이 있을 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당신이 만약 연애하고 싶다면 명심해야 한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매력이 무엇이 있을까?
분명한 건 그 매력에는 고통 따른다. 시간, 비용, 노력 세 가지 모두 고통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걱정하지 마라. 의미가 있다면 견딜 수 있다.
사랑의 원소를 찾는 당신. 고통스러운 사랑을 하고 있는가?
부디 의미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