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철학이 필요한 이유
사랑은 두렵다. 사랑은 시작할 때도 두렵고 끝날 때도 두렵다. 사랑하는 중에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하다. 사랑은 심원한 공포다. 나는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다가가지도 못했다. 잘 보이지 못할까 봐 두려워 숨었다. 그리고 친해지고 싶었다. 친해지려면 다가가야 했으나 다가가기엔 두려웠다. 같이 밥 먹자는 말도 하지 못하였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내가 그녀와 밥을 먹자고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그녀는 좋다고 말했다. 에로스는 내 편이었을까?
에로스 신은 탄생 설화가 많다. 옛사람들도 그만큼 사랑에 관심이 많았다. 그중 하나는 에로스의 가계도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전쟁의 신 아레스 사이에는 네 명의 자식이 있었다.
첫째 형은 공포
둘째 형은 근심
셋째 누나는 조화
넷째가 에로스다.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공포와 근심을 거치고 조화를 이룬다. 사랑이 그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랑의 시작은 떨림이다. 우리 몸은 이 떨림을 공포로 해석한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기 때문이다.
나는 호랑이를 마주친 듯 멈춰버린다. 등골이 오싹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호흡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나고 외면하고 싶다. 호랑이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가 다시 다가가고 싶다. 공포와 사랑은 동의어다.
친해진 후에는 근심이 생긴다. 왜 연락이 오지 않을까. 어떻게 답장해야 할까. 내가 재미없어지면 떠날까. 지금은 누구와 있을까. 다른 이성과 있을까. 노심초사 전전긍긍 근심으로 가득하다. 근심은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내 머리에서는 수 만 번 진행되고 있다. 근심이 나를 뒤흔든다. 멈출 수 없다. 근심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니, 근심을 멈추고 싶지 않다.
어느덧 공포와 근심을 이겨내고 용기를 낸다.
그녀에게 말한다. 나와 사귀자.
그녀가 웃는다.
고개를 끄덕인다.
조화가 생겨난 거다.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데이트를 한다. 서로가 조화를 이루며 사랑한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사랑을 느낀다.
에로스 신이 생겨나는 과정은 분명 공포 > 근심 > 조화 > 사랑이 분명하다.
나는 그녀와 사랑하는 순간을 꿈꾸었다. 현실은 공포였다. 내 사랑은 근심으로 넘어가지도 못하였다. 그녀와 용기를 내서 밥을 먹자고 한 걸 후회했다. 나는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다. 신경 써서 옷을 입었지만, 너무 못나 보였다. 머리카락이 신경 쓰였다. 상대방 말을 골몰히 생각하며 들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해석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할 말이 가득 차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는 '어떡하지?'였다.)
생각이 지나치면 침묵이 된다. 속이 메슥거렸다. 구역감이 올라왔다.
에로스 신은 내 편이 아니었다. 사랑이 떠났으니 근심할 필요가 없었다. 남은 건 후회와 미련뿐이었다. 그녀와 밥을 먹게 되는 날은 없었다. 그녀도 다른 여성과 다름없이 똑같은 한 사람에 불과한데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였다.
약속 전날부터,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게 가슴 뛰었다. 세상이 달라 보이고,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났다. 하루종일 그녀와 밥을 먹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결과는 비참하였다.
철학을 알았다면 그녀와 밥을 먹는 일이 달랐을까? 다른 이와 밥 먹는 거와 다르지 않고, 나를 필요 이상으로 들뜨는 건 내게 도움이 안 될 걸 알았다면 조금 더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 철학을 갖추고 경험을 쌓았더라면 대처하였을 거다.
상황은 나를 무너뜨릴 수 있지만,
철학은 나를 덜 비참하게 만들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