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리다 글프 02] 나는 왜 스포일러를 좋아하는가

2025. 1. 4. 10:10

by 가보리다


1.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서점에서 몇 장 흩어보다가 금방 덮어버렸습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소설책을 찾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읽은 소설책이 불편한 편의점의 작가 김호연의 망원동 브라더스였는데, 그나마 윌라 오디오북이 아니었으면 시도도 안 했을 것입니다.


인문학 에세이를 더 좋아하는 취향차이도 있지만, 그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2.


저는 소설이 주는 긴장감을 견디지 못합니다.


중학교 때, 소설의 구성 단계는 발단 전개 위기절정 결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배웠지요.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에 동화되어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위기와 절정에 다다를 때면 빨리 건너뛰고 싶어 집니다.
꾹 참고 읽었는 데, 새드엔딩이거나, 열린 결말로 끝나게 되면 더 허무해 집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저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초등 중등 때엔 제법 많은 소설책들을 읽긴 했습니다만, 주로 추리소설들이었네요. 에르큘 포아로나 미스 마플이 나오는 애거사 크리스티 걸작선을 즐겨 읽었던 듯 합니다.


그러고 보니, 주인공의 인생을 적나라하게 그려주는 1인칭 시점의 소설은 어렸을 때부터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작가가 특별히 엄선한 단어들로 극대화시킨 그들의 아픔과 슬픔이 때론 너무 ‘폭력적이어서’ 저는 직면하기 두려웠거든요.


3.


'나는 불편한 감정을 직시하지 못하는 구나…'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구나.'


‘내’가 부정적인 감정, 그러니까, 당황스러움이라던가, 부끄러움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것을 성인이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늘 불안했습니다.


그 불안이 어느 정도였나 하면, 잠시 외출하신 부모님이 돌아오시다가 교통사고가 당하시지 않도록 계속 기도를 올릴 정도였지요. (정작 두 분은 저의 이런 기우를 상상도 하지 못하셨습니다만.)


그래서 어렸을 때 저는 고백하건데, 쭈글이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읽는 법을 배우지 못했거든요. 적당히 상처받지 않은 영혼처럼 포장하며 20대, 30대를 살았습니다.


4.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남들도 다들 저와 비슷하단걸,
나처럼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모르는 체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조금 일찍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평화주의자가 되었지요.

나는 상처 받은 영혼,
너도 상처 많은 영혼,
서로 굳이 아픈 상처 건드리지 말자..



혹시 제 다른 글들을 읽으시고,
저의 남다른 처세술이 궁금하셨다면,
그 깊은 중심에는 ‘상처’와 ‘불안’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5.


스스로 불안이 높은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웃 분들이 추천해 주신 김주환 교수님의 내면소통 중에 제 4장 ’내가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 부분만 읽어 보았습니다.


자기 참조과정, Emplotment, 경험자아, 배경자아 좋은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만, 저는 불안이 높은 내 자아를 어떻게 하면 변화 시킨 수 있을 지 궁금했습니다.

‘자아’는 어떤 실체나 사물이 아니다. 많은 학자가 자아 또는 ‘나’라는 자의식을 ‘지속적인 스토리텔링 그 자체’로 본다. 즉 자신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존재가 곧 ‘나’라는 자의식이다. 내 안에는 여러 개의 ‘자아self’가 있다. 이 여러 개의 자아는 내 의식 표면에 떠오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내면소통 중에서 발췌




어? 여러 개의 자아? 딱 떠오르는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기쁨이 슬픔이, 화, 까칠이, 소심이.


6.


지난 여름에 Inside Out 2가 개봉했죠.
그 걸 방금 전에서야 봤습니다.
Anxiety(불안)이가 빌런으로 등장한다는 정보 정도는 알고 봤는데 생각보다 , 더 빌런이더군요.

불안이 컨트롤타워의 중심에 있는, 전전두엽 이 제 기능을 못하는 사춘기를 표현했지만, 저는 마치 작년 봄 여름 무렵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중년의 우울증 역시 사춘기처럼 불안을 높였나 봅니다.

기특하게도 스포일러 없이 끝까지 시청했습니다.
그건, 웬만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모두 해피엔딩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 정도의 갈등 상황 쯤은 주인공이 충분히 이겨 내리란 걸 알고 봤기 때문입니다.



7.


네.

결국은 해피앤딩.


저는 그것을 찾고 있는 거였어요.
그래서 스포일러들을 찾아다니는 거구요.

어렸을 때는 그래도 제법 읽던 소설들을, 성인이 되면서 안찾아 보기 시작한 것은, 내가 사는 세상이 소설보다 더 비극적이고, 그런 비극이 나 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였던 것 같습니다.

외면하고 싶었어요.

내 인생은 Inside Out속 라일리처럼 기쁨이가 컨트롤타워를 주고 있지 않았어요.

그 보다는 불안이가 등장할 때가 더 많았고, 지금은 슬픔이가 메인 컨트롤러인 것 같아요.


지뢰밭으로 가득 찬 인생 속에서, 조금이라도
‘불편한 감정 소모를 줄이려는 발버둥’치려는 제 자아가,
절 스포일러 헌터로 만들었습니다.

이젠, 나와 상관없는 일로 화내고 싶지 않아요.
불안하고 싶지 않아요.




8.


스포일러를 일부러 찾아다니고, 스포일링하기도 좋아하는 가보리다가,


그런 의미에서
2026년 대박 스포일러를 뿌리고 가겠습니다.
2026년도 수능 1교시 국어영역 1번 문제 정답은, 3번입니다.​

뭐…. 아님 말구요.

인생 뭐 있습니까.
1번 아님 2번,
아님 3번,
아니면 4번이겠지요.

이만 총총.





프로필
'포켓몬 가보리입니다.'라는 의미의 가보리다에서 어디든 가 보는 사람이 된 블로거 가보리다의 일기: '재미없음'에 알러지 반응이 있는 흔치않은 50대 아줌마 대문자P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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