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여행 5화
버스에서 내리니 라오스의 나까상 항구였다. 시판돈은 4천개의 섬이라는 뜻으로, 이름 그대로 메콩강 위에 수천 개의 섬들이 떠있었다. 섬까지는 배를 타야했다. 그런데 라오스인 가이드가 뱃삯 2.5달러를 내라고 했다. 캄보디아 가이드에게 다 냈다니까 자기는 버스비 5달라 말고는 받은 게 없다면서 무조건 뱃삯을 내라고 했다. 다른 관광객들은 불평을 하면서도 돈을 냈지만, 종일 쌓인 게 많았던 나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뱃삯을 낸 사람들은 모두 배에 올랐다. 가이드도 그 배에 오르려는 걸 내가 붙잡았다. 배가 떠난 선착장에 가이드와 단 둘이 남아 각자의 주장을 진전 없이 되풀이 했다.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종이와 펜을 꺼내들고 그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물었다.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도 했다. 그러자 그가 협상을 해왔다. 특별히 배를 공짜로 태워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잠시 후 우리는 나룻배에 나란히 앉았다. 마침 아름답기로 유명한 시판돈의 석양이 섬들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의 집은 선착장 바로 옆의 게스트 하우스였다. 그가 집으로 들어가자 어린 딸이 달려 나와 맞았다.
섬은 80년대 강촌 같았다. 강가를 따라 빈틈없이 게스트하우스가 늘어서 있었고, 촌스러운 반짝이로 장식한 술집에서는 큰 소리로 올드팝이 흘러나왔다. 12월 30일이라 술집마다 송년파티가 한창이었다. 조용한 숙소를 찾아다니다가 포기하고 아무 여관에나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옆방에서 나는 텔레비전 소리와 술집에서 나는 음악소리가 방안을 꽉 채웠다. 밤이 깊어가면서 거기에 풀벌레 소리가 더해졌다.
꿈을 꿨다. 조직의 비밀이 새나가고 있었다. 스파이를 색출하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을 때, 누군가 닭 우는 소리에 비밀이 있다고 속삭였다. 닭 우는 소리는 사실 적들이 쏘는 전파이며 그걸 통해 우리 대화가 도청당하고 있다는 거였다. 소리를 기계로 분석해봤더니 실제의 닭 우는 소리와 확연히 다른 파형을 그렸다. 그래서 그렇게 소리가 컸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닭 우는 소리에 잠을 깼다.
관광객들이 깨어나기 전, 이른 아침의 섬은 평범한 시골마을로 변해있었다. 어른들은 강에서 물을 긷거나 빨래를 했고, 사내아이들은 해가 뜨는 다리 위에서 게임기로 게임을 했다. 어린 아이들은 일하는 엄마를 졸졸 따라다녔고, 가축 새끼들도 부지런히 제 어미를 따라다녔다. 집집마다 마당에 닭, 오리, 돼지, 소, 개, 고양이를 키웠는데, 다 먹이를 찾아 저 가고 싶은 데로 돌아다녔다. 가축을 풀어 키우는 대신 가축이 작물을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경작지에는 꼭 울타리를 쳤다. 작은 화단과 화분에도 울타리를 잊지 않았다. 농부들이 대나무 울타리를 친 작은 밭과 화분에 물뿌리개로 물을 주는 모습이 소꿉놀이 하는 것처럼 아기자기했다. 어느 집 앞을 지나가는데 한 아이가 수줍게 웃으며 “사바이디(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그게 이 여행에서 익힌 첫 현지어가 됐다.
다녀보니 외곽에 있는 방갈로는 한산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외진 방갈로에 들어가 보았다. TV는 안채 깊숙이 있었고 음악을 틀지 않았으며 주변에 닭도 없었다. 당장 그 방갈로로 짐을 옮겼다. 마침내 원하던 대로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옆방의 백인들도 나처럼 일부러 외진 방갈로를 찾아온 것 같았다. 다들 조용히 해먹에 누워 자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해먹에 누워보았다. 보기와는 달리 자세가 영 불편했다.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 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풍경이라도 삼분 이상은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책을 가지고 나와 책장을 펼쳤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분주하게 자리를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백인들은 여전히 해먹에 누워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휴식하는 능력을 가진 그들이 대단해 보였다.
2012년의 새 해가 떠오르는 다리를 건너면서 나는 이미 주변 풍경에 흥미를 잃은 채 바닥만 보며 걷고 있었다. 나는 바람둥이가 된 것 같았다. 쉽게 흥미를 느꼈다가 쉽게 싫증내고, 싫증나면 바로 다른 이성을 물색하는 바람둥이 말이다. 가장 먼저 출발하는 배로 섬을 떠나기로 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인도차이나로 불리는 세 나라,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을 여행하게 됐다. 인도차이나는 프랑스인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며 쓰기 시작한 말로, 이 지역이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실제로 세 나라는 인접한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고 세 나라 모두 100년 동안 프랑스 식민지였다.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이 나라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상당히 비슷하게 보였다.
시판돈을 떠난 지 5시간 만에 라오스 남부의 최대도시라는 팍세에 도착했다. 호찌민에서부터 계속 북쪽을 향해 올라가는 길이었다. 국경을 두 번이나 넘었는데도 자연환경이며 사람들 사는 모습이 별로 달라지질 않았다. 인도차이나는 한 번도 얘기를 나눠본 적 없는 같은 반 친구 같았다. 공부도 못하고 집안 형편도 넉넉해 보이지 않는, 종일 한 교실에서 생활하니 공유하는 게 없진 않겠는데, 옷 입는 스타일도 맘에 안 들고 척 보니 나랑 통하는 게 없을 것 같은 그런 친구 말이다. 근데 하필이면 그 친구랑 짝이 됐고, 몇 마디 말을 나눠보니 짐작대로 얘기가 겉돌기만 하고 재미도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뜨거운 해를 피해 사원 그늘에 앉았다. 마당 한 가운데에는 양산을 쓴 부처님이 시원한 타일바닥에 앉아있었다. 더운 나라에선 부처님도 그늘을 밝혔다. 꼭 양산을 썼고, 양산이 없으면 아쉬운 대로 사람이 쓰는 우산이라도 썼다. 부처님의 그늘 밑에는 고양이가 누워 있었고, 맞은 편 나무 그늘에는 이마에 한자 문신을 새긴 스님이 앉아 계셨다. 이런 날씨엔 그들처럼 가만히 그늘에 있는 게 맞았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한 군데 머무르지를 못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웹서핑에 빠져있었다. 일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클릭질을 했는데, 지긋지긋해하면서도 그 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여행을 떠나며 그놈의 웹서핑에서 놓여난 줄 알았지만, 여행지에서도 나는 맥락 없이 클릭질하던 그 호흡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헤매 다니고 있었다.
나는 공연히 햇빛 속으로 뛰어들어 방향도 없이 걸으며 두고 온 그늘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 한국 사람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한국분이시죠? 가이드북을 보니까...” 라고 인사를 했다. 사실 한국인끼리는 옷 입는 스타일과 표정, 서고 걷는 자세만으로도 동향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보았지만, 나뿐 아니라 다른 한국인들도 굳이 손에 든 가이드북을 보고서 알아보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익명의 공간에서 누군가에게 파악된다는 건 불쾌한 일일 수 있고, ‘저 멀리서부터 당신을 보고 뛰어온 게 아니라, 지나다보니 한국가이드북을 든 당신이 우연히 보였어요.’ 라고 말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나란히 메콩강가에 앉았다. 한국말에 굶주려서 누가 전화번호부를 줄줄 읽는다고 해도 그게 한국말이기만 하다면 감미로울 것만 같았는데, 나는 그녀와 나란히 앉은 지 채 몇 분도 안 돼 괜히 말을 시켰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혼자 있는데 너무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상대방에게 신경 쓰며 할 말을 찾으려고 애쓰는 게 귀찮았다. 배려를 빙자해 “가셔야 될 때 얘기하세요.”라고 말했고 그녀는 예민하게 알아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던 길을 갔다. 그녀와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강변도로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포장마차에선 삼삼오오 마주앉은 사람들이 꼬치구이 안주에 비어라오를 마시고 있었다. 부러웠다. 내가 한 짓을 후회했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날 밤 늦게 비엔티엔행 버스를 탔다. 침대차였는데 옆 침대 아가씨가 장거리버스의 비밀을 말해주었다. 버스가 출발하면 짐칸의 커다란 트렁크 속에서 사람이 나와 승객들의 가방을 뒤져 돈을 꺼내간다고 했다. 자기가 태국 동전이 든 봉투를 가방에 넣어뒀는데 나중에 보니까 은색 동전은 그대로 있고 비싼 노란 동전만 사라졌더라고 했다. 그는 곧 잠이 들었지만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두운 짐칸에 하얗고 동그란 손전등 불빛이 켜지더니 짐칸의 가방들을 하나씩 비추던 불빛이 내 트렁크를 비췄다. 지퍼가 열리고 옷가지들 사이로 파란 시계가 보였다. 손전등 조명을 받은 시계는 너무 예뻤고 나는 언제까지나 나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비엔티엔에 이르니 처음으로 구름 낀 하늘이 나타났다. 그게 가장 큰 변화였다.
도미토리에 묵었다. 같은 방에 재불교포가 있었는데, 비엔티엔에만 두 달째라는 그는 비엔티엔이 한국음식이 맛있고, 술과 대마도 싼데다, 경찰이 터치를 안 해서 좋다고 했다. 그는 비어라오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거나, 담배를 피우며 텔레비전을 보거나, 대마를 피우며 텔레비전을 봤다. 그러다가 잠깐씩 나갔다와서는 밤새도록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취하는 거야말로 별 볼일 없는 시간을 즐기는 가장 쉬운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장이 안 좋은 체질인데 하나 밖에 없는 화장실을 그와 교대로 들락거리고 싶진 않았다. 일단 도미토리를 나서기로 했다.
비엔티엔은 라오스의 수도라고는 해도 대도시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점잖고 느긋한 지방도시 쯤으로 보였다. 한산한 도로를 걸어가는데 장례행렬이 지나갔다. 스님들과 상복 입은 여자들이 하얀 상여를 뒤따르고 있었다. 행렬이 근처의 절로 들어가기에 따라 들어갔다. 행렬은 마당에 관을 놓고 법당에서 예불을 드렸다. 예불이 끝나자 스님과 상주들이 영정사진을 들고 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상주들은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찍어내면서도 사진을 많이도 찍었다. 사진 촬영이 끝나자 관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그걸 보면서 슬픔에 빠질 준비를 하는데, 휘장에 불이 붙는 순간 한 사내가 하객들을 향해 사탕과 쌀과 삼각형으로 접은 지폐를 던지는 바람에 감정이 깨지고 말았다. 하객들이 달려들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엔 쌀알만 남았다. 나는 겨우 사탕 몇 개를 주웠는데, 다른 사람들은 지폐를 서 너 개씩 들고 그 지폐에 적힌 일련번호를 확인하느라 야단이었다. 그 숫자를 가지고 로또를 한다고 했다. 다시 관을 보았다. 어느새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울컥 눈물이 솟으려 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오열할 줄 알았던 상주들은 절을 빠져나가고 있었고 하객들도 뿔뿔이 흩어지는 분위기였다. 황망히 눈물이 증발했다.
나는 관에 불을 붙일 때부터 영화를 보듯 그 이미지에 반응하고 있었다. 나는 죽음과 일상이 분리된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죽음을 매체를 통해 배웠다. 화염과 슬픔을 연결시키는 건 TV나 영화 같은 시각매체의 관습이다. 이 매체들은 화염 이미지와 오열하는 이미지를 병치시켜 죽음을 극적인 사건으로 만드는데, 나는 그렇게 학습된 이미지에 자동적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청소부들이 장 내 쓰레기를 모아다가 관 위에 던지는 걸 보면서 밖으로 나왔다.
땡볕을 걷다가 그늘도 급하고 화장실도 급해서 한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매점에 앉아있는데 선생님이 다가왔다. 국어도 가르치고 영어도 가르친다는 그는 영어를 잘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영어로 말을 하려면 외국인을 만나야하는데, 너무 바빠서 관광 지구에 갈 짬을 낼 수가 없다면서 저녁 때 자기랑 만나 영어회화를 하자고 했다.
저녁 때 그를 다시 만났다. 네이티브가 아닌 외국인들끼리 얘기를 할 때 가장 곤란한 점은 발음이다. 간단한 단어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집에서 어떤 가축을 기워요?" "집을 지키게 하려고 오리 2마리를 키워요." "오리가 집도 지킨다구요?" 필담 끝에 그가 키우는 동물이 오리duck가 아니라 개dog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대학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있었다. 교사 봉급이 너무 적어 졸업하면 프로그래머 일을 할 거라고 했다. 그는 자기 월급은 100달러, 대학 학비는 일 년에 1000달러쯤 된다면서 한국은 사정이 어떤지 물었다. 한국은 초봉이 1000달러, 대학 등록금이 10000달러 쯤 되니까 라오스나 한국이나 사는 게 빠듯하긴 마찬가지일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짜우아누봉 공원엘 갔다. 거기엔 라오스 마지막 국왕이라는 짜우아누봉왕의 동상이 서있었다. 라오스의 독립을 위해 태국과 용감히 싸운 왕이라고 했다. 전쟁에서 이겼는지 물었더니, 아니라고 태국에 끌려가 사형 당했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왕이 누가 있는지 곰곰 생각해보았다. 강화도며 러시아공관으로 도망 다닌 왕들만 생각났다. 동상에는 존경을 표하는 노란 꽃다발이 걸려있었고, 밤늦도록 참배객들이 이어졌다.
그 다음날도 공원엘 갔다가 영어회화를 하자는 예비스님을 만났다. 그처럼 붙임성 있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라오스인들은 외국인이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에게 “사바이디 (안녕하세요)해야지, 사바이디!” 하고 가르쳤다. 그렇게 인사교육을 잘 받은 라오스인들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길에서 만나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고,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으며, 꼭 이름을 묻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다가 옆 좌석과 합석을 하게 됐다. 근처 호텔 직원들이었는데 지배인, 세탁 담당, 운전사, 벨보이라고 했다. 그들은 꼭 20년 만에 만난 나의 대학동창들 같았다. 술을 마실 때마다 건배했고, 종종 잔 비우기를 강권했으며, 내가 결혼을 안 했다고 하자, 정말로 여태 결혼을 안 했는지 왜 안 했는지 앞으로도 할 계획이 없는지를 거듭 물었으며, 술자리가 무르익자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재불 교포처럼 나도 비엔티엔이 좋아졌다. 날씨 좋고, 음식 맛있고, 단골로 다니는 카페도 생겼고, 사람들도 친절했다. 그런데도 나는 주요관광지를 돌자마자 서둘러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다녀보니 인도차이나의 유명 관광지가 어떨지 대충 알만했고, 이미 루앙프라방에 대한 기대는 없어진 지 오래였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