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 떠다니는 섬

From 1919 to 2022

by 시드니


“인생 다 산 것처럼 아는 체하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근데 정말 그런 사람이 있어요. 유독 사랑이 힘든 사람이요. 내가 그래요”


“내겐 사랑이 ‘깨어 있는 꿈’ 같아요”


“아이 아빠와 헤어지고 너무 아파서 도대체 인간에게 ‘사랑’이란 게 도대체 뭘까 하면서 골몰한 적이 있었어요”


“몇 날 며칠을 생각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어떻게도 안 잊히는 감각이 있더군요. 촉감이었어요. 그와 뺨을 비볐을 때, 그의 품에 안겨 맨살이 닿았던 그 촉감은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 촉감은 꿈에서도 계속됐어요. 어쩔 땐 냄새 같기도 하던데, 잠에서 깨어나 문득 눈을 뜨면 꿈인지 아닌지가 몽롱한 상태에서도 그 감각이 느껴졌어요. 사람에겐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고 하던데 내겐 그 사람의 그런 감촉이 세월에도 씻겨지지 않는 기억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그 감각을 ‘깨어 있는 꿈’이라고 생각했어요. 실제 없는 데도 있는 것처럼 있어도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아픔은 어느새 없어지던데 그놈의 감각은 더 뚜렷해졌어요. 그게 오랫동안 고통스러웠는데 지금은 미소 같이 잔잔해요. 좋지도 않지만 싫지도 않은 엷은 입가의 미소 같이 ... ”


“나는 태길 씨가 좋은 사람이고 매력적인 남자라고도 생각해요. 또 우리가 이 정도 지점에서 같이 할 수 있다면 딱 좋겠다는 숙희 말을 생각해 봤던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자신이 없어요. 그게 꼭 태길 씨의 직장 때문은 아니에요. 지나간 시간처럼 다가올 시간에도 그런 사랑을 또 한다는 게 생각만 해도 너무 힘들어요. 태길 씨는 사랑 뒤에 사랑이 있다고 말했죠? 그래요. 사랑 뒤에는 사랑이 또 있을 거예요. 그래야 맞는 거죠”


“태길 씨!”


“우린 풋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많이 살았죠? 그렇다고 익은 사랑만 할 수도 없잖아요. 겪어봐서 알겠지만, 나 그렇게 복잡한 사람은 아니에요. 사랑이 어려운 여자일 뿐이죠”


“우리 여행 가요. 내가 태길 씨의 마음을 다 받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친해질 수 없는 건 아니잖아요. 나도 태길 씨 나쁘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 여행 가요. 오래전부터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어요”


“남해 어딘가에 가면 섬들이 떠다니는 바다가 있데요. 재밌지 않아요? 그 바다에는 섬들이 물고기처럼 풍덩풍덩 빠져있다니 우리 한번 그곳에 가봐요”




2008년 노무현 정권이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었다. 진영이 갈린 정권교체였기에 국정원은 새 정부의 인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태길이 갑자기 휴가를 간다고 하자 부서 직원은 이 시기에 미친 짓이라며 태길을 만류했다.


“그럼 자르라고 해! 할 만큼 해서 미련도 없어!”


“아니 ~ 팀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어쩝니까? 그동안 우리 라인 만들려고 그 개고생을 하고서는 인제 와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새끼들 다 버리시겠다는 겁니까”


“아이, 참 ~ 그게 아니고 인마! 정권 바뀌었다고 그대로 날아갈 목숨이라면 그렇다는 거지 … 너무 그렇게 민감해도 안 좋은 거야. 지금은 국장선 위쪽이 어찌 되나 하는 게 더 중요해. 그러니까 자중하고 괜히 책잡히지 않게 긴장하라고”


태길은 아침 일찍 쌍문동 지수의 집 앞에서 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길은 초등학교 때 소풍 가던 날 설레어 보고 나이 먹어서 이렇게 설레는 자신을 보며 ‘거참 이 나이에 설레기도 하네’ 하면서 혼자 헛웃음을 지었다.


잠시 뒤에 약간 멋쩍게 웃는 지수가 집에서 나왔다. 태길은 지수의 웃는 모습이 눈에 부서져 들어왔다. 순간 ‘이런 게 사랑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태길은 그런 마음이 쑥스럽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지수의 반응이 무서웠다. 태길도 가볍게 웃으며 지수를 맞았다.


남해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남해는 육지의 맨 끝에서도 가장 멀리 있었다. 가는 길 내내 둘은 말이 없었다. 긴 어색함이 이어졌지만 두 사람 모두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은 두 사람의 어색함을 희석해 줬다.


“와 ~”


지수가 태길이 예약한 펜션의 방문을 열고 놀라 했다. 그 방은 바다 쪽 벽이 모두 하나로 된 통유리여서 마치 방안에 바다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늦은 오후 남해 바다는 은빛이었다. 바다는 석양에 물들기 전 은빛으로 물들었고, 멀리 수평선 가까이서 한두 척의 커다란 배가 작고 조용하게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바다가 고요했다.


태길이 고요의 바다에 빠진 지수를 뒤에서 가만히 안았다. 지수는 태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격정이 흐른 후 지수는 잠들었다. 지수의 잠은 깨어나지 않았다. 태길은 속으로 지수가 잘못되었나 싶었지만, 잠들어 있는 곤한 지수의 얼굴을 보면서 며칠을 보냈다. 지수는 잠은 터무니없이 계속되었다. 태길은 그런 지수를 깨어나지 않도록 먹을 것을 날랐다. 지수가 깨어 있는 시간은 격정과 식사뿐이었다. 그 외의 시간에 지수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무슨 잠을 그렇게 자요? 난 뭐가 잘못된 줄 알고 놀랐어요. 펜션 주인이 날 보고 이렇게 방에만 있는 손님들은 처음 본데요. 밥은 먹고 있냐고 걱정하더라고요”


그 며칠이 지나 처음으로 밖으로 나온 태길이 지수에게 한 말이었다. 지수가 그런 태길을 보고 하얗게 웃었다.


“글쎄 말이에요. 나도 놀랐어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잘 수가 있을까요”


지수가 먼바다를 보고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처음이었어요.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이 떠나고 난 뒤 한 번도 깊은 잠을 잔 적이 없었어요. 언제나 불안하고 무서웠어요. 밤이 되어 어두워지면 시간이 멈췄어요. 기어이 해가 뜨고 나서야 겨우 시간이 흘렀죠”


“그런데 요 며칠은 그렇지 않았어요. 잠이 쏟아지는데 깨어나고 싶지 않더라고요. 이렇게만 잘 수 있다면 평생 잠만 자고 싶어요. 고마워요. 태길 씨! 이런 행복을 느끼게 해 줘서 … 깊은 잠이라는 게 이런 거군요”


지수가 밝게 웃자 태길이 신이 났다. 그 바다에 석양이 물들고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를 반복하며 해안을 따라 걸었다.


“난 태길 씨에게 줄 게 없어요. 어떻게 해도 전 그 사람을 잊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나는 태길 씨에게 나쁜 사람인 것 같아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석양이 물든 바다를 바라보고 태길이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지수 씨! 내가 지수 씨 좋아하는 거 맞지만 그게 지수 씨를 힘들게 하는 거라면 내가 좋을 리가 없잖아요. 그냥 이렇게 서로 좋아하는 정도로 지내요. 난 그 정도면 돼요. 내가 지수 씨를 좋아하니까 지수 씨가 좋은 쪽으로 가봐요 우리 … 그러다 우리가 늙어서 같이 있어도 좋겠다 싶으면 말해줘요. 그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지수는 그런 태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태길 씨는 내가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태길이 그윽한 눈으로 지수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이 달라졌어요. 지금까지 내가 지수 씨를 좋아했던 이유가 정말 많았거든요. 한 백가지는 말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요 며칠 상간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나는 지수 씨가 자고 있는 모습이 좋아요. 내 옆에서 눈을 감고 자고 있는 당신 모습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 모습이 내게 있으면 난 그것 만으로도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수 씨 사랑합니다. 지수 씨가 날 사랑하는 때까지 사랑할게요. 그러다 언젠가 지수씨가 날 떠날 때가 있게 되어도 아프게 하지 않을게요. 이제 더는 아프지 말아요. 내가 대신 아플게요”


그 바다에서 노을진 붉은 석양이 고요한 파도소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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