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 작부의 순정

From 1919 to 2022

by 시드니


지수의 다큐가 칸에서 ‘주목할만한 시선’으로 선정되자 국내에서는 연일 관련 기사가 이어졌다. 지수의 승부수가 먹혔다. 다큐가 흥행에 성공하고 지수는 처음으로 직원들에게 상여금을 줄 수 있었다. 받는 직원들보다 주는 지수가 더 신이 났다. 도대체 얼마만인지 지수가 사람들 앞에서 깔깔거렸다. 한참을 웃다 보니 몇 달 전 칸에서 로저에게 구박받던 일이 생각나 피식하고 혼자 웃었다.


“헤이 ~ 지수 여기 칸이야! 그리고 우리는 초청 인사야. 그런데 어떻게 드레스가 없어?”


지수는 칸으로 가면서 드레스를 가져가지 않았다. 아니 가져갈 드레스도 없었고, 드레스를 입고 가야 하는 파티에도 가본 적이 없었으니 그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도 못했다. 같이 간 한교수도 마찬가지였다. 한 교수는 칸의 역사에 대해서 줄줄이 꿰고 있었지만 정작 칸의 파티에서 입어야 할 턱시도는 생각하지 못했다. 칸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한 교수는 입에 침을 튀기며 지수에게 칸이 무엇인지 어찌 돌아가는지를 설명했지만, 정작 로저가 데려가려는 칸의 파티와 드레스 턱시도는 그의 해박한 지식의 범주가 아니었고, 로저의 구박을 받은 지수는 애 굳은 한 교수에게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저에게 받은 면박을 줬다.


“내가 어찌 알아볼 테니 두 사람 다 좀 기다려 봐”

“아니에요. 우리가 해결할게요. 아무튼 낼 저녁에 드레스 하고 턱시도 입고 가면 되는 거잖아요”


지수가 고집을 부렸다. 꼭 로저에게 구박을 받아서 삐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게 마치 옷을 얻어 입는 것 같아 싫었다. 그렇다고 지수에게 대책이 있는 것도 사실 아니었다. 로저에 대한 지수의 자존심에 한 교수는 둘 사이에서 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저 대표님 ~ 대책이 있으신 거예요?”

“아뇨! 한 교수님 ~ 여기 우리 옷 부탁할 아는 사람 없어요? 뭐 대사관 직원이라든지 ”


대책 없는 지수의 자존심에 한 교수가 흘리는 땀이 눈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지수는 쩝쩝거리며 호텔로 돌아왔고, 내일까지는 어떻게든 드레스와 턱시도를 만들어 내야 했지만 신데렐라의 기적이 아니고서는 방법이 없었다. 생각다 못한 지수는 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깔깔깔 야 ~ 쌍문동 깡패는 내가 아니고 너구먼 ~”

“에휴 ~ 글쎄 말이야. 그래도 로저한테 옷을 얻어 입기는 정말 싫더라고”

“그럼 그럼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푸하하 ~”


순이는 지수의 전화를 끊고 제임스를 닦달했다. 여하튼 내일 저녁에 지수와 한 교수에게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혀야 하니 방법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었고, 제임스는 ‘난 엔지니어지 디자이너가 아니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인 것은 지수나 순이나 마찬가지였다. 순이는 날 위한 상속재산이 있으면 지금 여기에 쓰라고 생떼를 부렸다.

제임스는 정말 거금을 들여서 다음 날 아침 지수 앞에 디자이너를 보냈다. 그리고 어떻게 입었는지는도 모른 채 그날 밤 지수와 한 교수는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로저 앞에 나타났고, 지수는 로저의 놀란 얼굴을 보며 한껏 드러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그날 생각을 하니 지수는 자신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날 그리 도와준 순이 언니가 너무 고마웠다. 그러다 갑자기 순이의 말이 생각났다.


“나도 너한테 부탁이 있어”

“뭔데 언니! 뭐든 말만 해 한국에서 하는 거면 내가 하늘의 별도 따주지! 하하하”

“음 ~ 사실 한국에서 찾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있어.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그 시절에 오죽했었니. 그때 한참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있었어. 유진이라고, 내가 영국에 오게 되면서 연락이 끊겼지. 사실은 내가 연락을 끊었어. 그때는 한국에 있는 어떤 것도 가져오기 싫었거든. 근데 이제 정말 세월이 지난 건지 걔가 너무 보고 싶네”

“응 그랬구나 우리 언니! 그래 그럼 어떻게 찾으면 돼?”

“글 세다 ~ 사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것 밖에는 몰라. 그 얘는 졸업도 하지 않았어 나 만큼이나 어려웠거든”


“알았어 언니 내가 찾아볼게. 걱정하지 마! 나 국정원 요원도 아는 사람이라고”


지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결국 태길에게 도움을 청했다. 흥신소를 찾아가 볼까도 했지만 겁이 났다. 차라리 태길에게 잔소리를 듯는 게 낮겠다 싶었다. 태길은 예상대로 이런 일을 부탁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한번뿐이라며 못 이기는 척 지수의 부탁을 들어줬다.


“지수 씨 ~ 이거 안 좋은데요. 그냥 영국 친구에게 모른 척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

“왜요. 그 사람이 뭐 안 좋아요?”

“흠 ~ 지수 씨 내가 이런 말 하는 건 아닌 것 같기는 한데. 암튼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잖아요. 밝은 쪽이 있고, 어두운 쪽이 있고. 그 사람은 좀 어두운 쪽 사람 같아요”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밝기만 한 사람이 있나요?”


태길은 지수가 물정을 모른다는 표정으로 한잠을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허 ~ 참 그게 아니고요. 암튼 이게 그 사람 연락첩니다. 근데 거기 술집이에요. 사실 술집이라고도 하기가 좀 그래요. 아 ~ 이거 참 뭐라고 설명을 해주기도 그렇고 참 ~ 아무튼 이곳에 지수 씨는 가면 안돼요. 영국 친구에게 연락처만 전해주던지 하고 지수 씨는 그냥 잊어버리세요”


물어도 답이 없는 태길을 더 채근할 수 없었던 지수는 절대로 직접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하는 태길과 헤어져 숙희를 만났다. 숙희도 태길을 말을 못 알아듣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여기 연락처에 지수 너한테는 전화도 말고 가보지도 말라는 거잖아”

“글쎄 말이야. 술집이면 뭔 대수라고. 그 사람이 산전수전 다 겪은 아줌마를 뭘로 보고 흥 ~ ”


지수는 차라리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서야 순이에게 그런 유진의 연락처만 달랑 전해줄 수는 없었다. 지수와 숙희는 일단 그 주소지까지 가서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태길이 그토록 막아서는지 알아보자고 했다.


유진이 있다는 곳은 의정부의 외곽에 있는 어느 어두운 골목길에 모여있는 술집 촌이었다. 싸구려 간판이 즐비하다는 것 말고는 별게 없어 보였다. 지수와 숙희는 태길이 별것도 아닌데 호들갑을 떤다며 곧바로 태길에게 받은 유진의 전호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은 가는데 전화는 받지 않았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지수와 숙희는 잠시 생각하다 직접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아 별로 무서워 보이지도 않았고, 건너편에는 경찰서도 보였다. 지수는 내가 앞장설 테니 여차하면 걸 수 있도록 숙희에게 핸드폰만 잘 쥐고 있으라고 했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문고리를 잡으니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야릇한 냄새가 훅 들어왔다. 낮인데도 실내는 침침했고 방향제 냄새도 담배냄새도 아닌 꾸릿한 냄새가 났다.


“여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누구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술집 사장인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어두운 곳으로부터 나왔다. 그녀는 긴장한 모습으로 어두운 곳에서 지수와 숙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수와 숙희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는 어두운 곳에서 머물렀다.


“저 ~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 친구예요. 이유진이라고 이곳에 있다고 해서요”


친구라는 말에 어둠 속 그녀는 지수와 숙희를 샅샅이 훑더니 빛이 있는 곳으로 조금 나왔다. 그녀의 몸은 육중했으나 굴곡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짙은 화장을 시작한 듯했다.


“여기 유진이라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지 마시고 여기 있다고 해서 어렵게 알고 왔어요. 정말 친구예요. 여기 전화번호도 있어요. 한번 보세요”


그녀는 지수가 내미는 전화번호를 보더니 조금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유진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뒤에 있는 숙희가 답답했는지 갑자기 한국은행 신분증을 꺼내 들며, ‘저희 은행 다니고요. 경찰이나 뭐 그런 쪽 사람들 아니에요. 정말 친구들이 이예요’라며 치고 들어왔다. 지수는 그새를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한순이 ~ 한순이라고 하면 알 거예요. 말이라도 좀 전해주세요. 사장님 ~ ” 그러자 그녀가 서 있던 옆의 방문이 벌컥 열리고 허벅지를 드러내고 앉아 있던 한 여자가 말했다.


“누구라고요? 한순이? 한순이라고 했나요?”

“네 한순이 맞아요. 저희 순이 언니 동생들이에요”




「 순이한테는 날 찾지 못했다고 전해주세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희망이 제일 나빠요. 내일이면 뭐가 변하겠지 하는 희망은 오늘을 더 힘들게 할 뿐이에요. 그냥 오늘 하루만 별일 없이 살면 돼요.


그때 순이가 영국으로 시집간 건 알고 있었어요. 나한텐 연락도 하지 않았지만, 그땐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섭섭하지도 않았어요. 다시 돌아오지만 않았으면 했어요.


순이가 그렇게 가고 나서 나는 더 나락으로 떨어져서 끝내는 이 술집 저 술집으로 팔려가기 바빴어요. 사랑에 속고 돈에 속더니 어느 때부터는 내가 사랑과 돈을 속이더군요. 그러다 나이가 마흔이 넘으니까 이제는 날 사겠다는 사람도 없어요. 여기는 술집 여자들이 늙어서 마지막으로 오는데에요.


여기 여자들은 더 늙기 전에 착한 홀아비라도 만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어쩌다 운이 좋아 그렇게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마저도 얼마 버티지 못해요. 그게 아니면 어디 기둥서방 같은 놈을 만나서 몸 주고 정주고 돈 주고 그러고도 또 버려지는 게 일상이에요.


순이가 그렇게 잘살고 있다니 꿈만 같네요. 잊은 줄 알았는데 그 세월에도 날 기억하다니 참 ~ 난 순이를 잊고 살았어요. 가끔 생각나기도 했지만 어디서 죽지 않았으면 살아있겠지 하는 정도였어요. 순이는 어렸을 때도 뭐든 똑 부러졌어요. 그때 우리들 중에 대장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어요. 나중에 영국 사람을 만나 시집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아무도 순이랑 연락이 되지 않더라고요.


순이한테는 날 찾았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순이가 기억하는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에요. 나는 아마 오늘 죽는 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없어요. 나도 그게 아쉽지 않고요. 그냥 오늘 하루 매상만 잘 올랐으면 좋겠어요. 그럼 저 지겨운 빚쟁이들도 며칠은 안 보겠죠.


그 정도예요. 그 정도면 난 괜찮아요. 아직은 이 몸뚱이로 그렇게는 살 수 있어요. 사람이란 게 어이없이 허무하게 죽기도 하지만, 지독스럽게 질기도록 살기도 하더라고요. 내가 그렇게 살아요. 죽지도 않고 않고 지겹도록 질기게 …


처음 보는 친구들인데 너무 말이 많았네요. 순이의 동생들이라고 하고 이렇게 어렵게 찾아와 줘서 어쩔 수 없었어요. 술 한잔 건네지 못해서 미안해요. 이제 장사를 시작해야 해요.


지금 내가 한 말은 전해지길 바라지 않는 순이에게 하고픈 말이었어요. 난 이렇게라도 순이 소식 들었으면 됐어요. 나도 언젠가는 편해지는 시간이 오겠죠. 아니면 이러다 죽어서 편해지던지 … 나는 순이를 이렇게 덕지덕지 묻은 화장을 하고 보고 싶지는 않아요. 어느 맑은 날이 있으면 스치듯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것처럼 보고 싶어요.


술집 작부의 마지막 순정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러고 보니 내게도 아직 순정이 남아 있네요. 친구들! 순이 소식 전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랑 순이는 남은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는 보게 될 거예요. 여기 사람들은 그것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 만나게 될 사람은 어떻게든 다시 만나게 돼요. 아니면 인연이 다한 거구...


고마워요. 잘 가요. 잘들 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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