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 편지

From 1919 to 2022

by 시드니

2004년 개성공단 조성이 마무리되었다. 남북한의 화해 분위기는 분단이래 최고로 고조되었고 공단에 곧 입주할 남한의 중소기업과 공단에 투입될 북한의 인력은 모두들 설렘 반 우려반으로 기대에 부풀었다. 남북한은 분단 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협력과 화해의 길을 찾아내고 있었다.


지수는 개성공단에서 종대의 북쪽 손자 석구를 만났다. 종대의 묘는 평양에 있다고 했지만, 너무나 많은 복잡한 이유로 지수의 평양행은 거절되었고 그나마 한참 진행 중인 개성공단에서 만나기로 되면서 지수 일행은 순조롭게 휴전선을 넘을 수 있었다.


자유로를 따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넘으면서 지수의 마음이 쿵쾅거렸다. 지수뿐 아니라 동행했던 모두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불안했다. 불안한 모습을 북한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라는 국정원 직원의 채근에 모두들 큰 숨을 쉬고는 눈을 부릅떴다.


지수는 한눈에 석구를 알아봤다. 석구는 마르고 초췌했지만 두 사람이 종대의 자손임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양쪽 당국자들의 소개를 받은 지수와 석구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지수는 종대를 본 일이 없고, 석구는 서희를 모르니 지수와 석구는 서로 모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 누가 먼저였는지 종대의 편지를 전달하는 절차에 대해 논의가 시작되었다. 북측은 애국 렬사인 종대의 편지가 전달되는 것이니 북의 의전절차에 따르면 될 것이라고 했고, 남측은 서로 기록하기로 했으니 우리 쪽 활동을 제한하면 안 된다고 맞섰다. 논쟁은 계속되었고 지수와 석구는 없는 사람처럼 되었다.


“석구야!”


갑자기 석구를 부르는 지수의 한 마디에 모두의 입이 닫혔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석구야! 우리가 비록 이복지만 그래도 형제지간이고 내가 누나인 것 같으니 편하게 할게 그게 북의 예법에도 어긋나지는 않겠지”

“어찌 되었든 우리 엄마 그러니까 너의 큰어머니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할아버지와 그렇게 헤어진 뒤에 남겨져서 지금까지 정말 힘들게 살았어”

“아버지가 북한의 장군인 덕에 우리 엄마는 독립군의 딸이었지만 남쪽에서 그 많은 독립유공자의 자손도 되지 못했고 그저 쫓겨 다니듯이 살았다. 그러다가 엄마에게 남겨진 할아버지의 편지 한 통이 있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널 만난 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도 할아버지의 소식 하나를 듣지 못하고 전해주려 한다는 편지의 봉투조차도 보지 못했어! 이건 좀 아니지 않니?”


“여기 계시는 남북한 당국자 여러분! 그게 북쪽이든 남쪽이든 이건 아니지 않나요!”


쏟아지는 지수의 말에 모두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남쪽 담당자는 그런 지수를 보고 어쩔 줄 몰라했고, 북쪽 담당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수를 한참 바라보더니 자리를 떴다. 석구는 말없이 식은땀을 흘렸다. 잠시 뒤 돌아온 북한 담당자가 석구의 귀에다 대고 뭐라고 전했다.


“역시 렬사의 자손 답습네다. 누님 ~”


석구가 처음으로 지수에게 한 말이었다. 지수와 석구를 남기고 모두들 밖으로 나갔다.


“할아버지는 십 년 전에 돌아가셨고, 평양 대성산 혁명렬사릉에 모셨습네다. 생전에 남쪽에 있는 가족들 생각에 많이 힘들어 하셨습네다”


석구는 지수에게 빛바랜 편지 봉투를 건넸다. 누렇게 변한 그 편지를 보는 순간 지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서희는 지수에게 할아버지의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게 했다. 할아버지의 그 어떤 것이든 지수의 삶에 섞이는 것이 서희는 겁났다. 그랬던 지수가 이런 감정이 들 줄은 몰랐다.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기억의 언저리에도 없는 할아버지의 체취에서 눈물이 먼저 날 줄은 몰랐다.


“석구야! 난 이 편지를 읽을 자격이 없어. 이 편지는 그대로 엄마에게 전할게. 아무튼 고맙다. 이렇게라도 해주니 엄마가 고마워할 거야”


석구가 지수에게 편지를 전한 뒤 다시 들어온 남북한의 당국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서로의 장비로 석구와 지수의 만남을 기록했다.


돌아온 지수에게 종대의 편지를 전해받은 서희는 차마 그 편지를 열지 못했다. 종세와 지수는 방을 나왔고 방문이 닫히자. 서희가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 서희의 울음은 서러웠고 그리웠다.


“아버지 ~ 아버지 ~ ”


지수가 어쩔 줄 몰라하며 다시 들어가려 하자 종세가 지긋이 지수의 손을 잡았다.


“지수야 ~ 잠시만 더 있자. 엄마는 울 자격이 있어!”




「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나의 딸 서희에게


살아생전 당신과 서희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보지 못한 것이 하루도 잊지 못하는 평생의 후회였소. 참혹한 전쟁 속에서 당신과 서희를 두고 왔으니 나는 그 죄로 죽어서도 지옥에 있을 것이오.


조국의 해방을 위해 당신과 서희를 두고 만주 벌판을 그리도 헤매고 다니더니 해방이 되고서도 가족을 찾지 못하고 전쟁 통에서 그 꿈같았던 당신과의 며칠만에 다시 헤어져 이제는 죽어서야 당신에게 소식을 전하게 되는구려.


그렇게 당신을 서울에 두고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끌고서라도 당신과 서희를 데리고 왔어야 했지만 이제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당신과 서희를 거두지 못한 못난 이 사람은 후회와 연민으로 구천을 떠 돌 것이니 그것으로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오.


이 편지가 언제나 당신에게 전해질지 나는 알 수가 없구려. 필시 전해지지 않을 것이 더 명백하지만 그래도 당신과 내 딸 서희에게 이 말 한마디라도 전하지 않는다면 나는 구천의 지옥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오.


당신과 서희를 두고 떠난 지 벌써 몇 해가 지난지도 모를 세월이 지났지만 내가 그토록 원하던 조국의 통일은 더 앞길을 알 수 없게 된 것 같소. 당신과 서희가 굶어 죽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하루에도 몇 번씩 총을 버리고 당신에게 돌아가고 싶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소.


이 편지가 전해지지 못해도 당신과 서희가 무탈하게 그쪽에서 살아가기만 한다면 나는 더는 소원이 없소. 평생을 조국을 위하여 헌신하겠다고 했지만 당신과 서희를 지키지 못한 못난 남편과 아비일 뿐 아무것도 아닌 내가 너무나 초라하고 미안하구려.


부디 이 편지가 전해지길 소원하오. 그리만 된다면 당신과 서희가 무탈하다는 증좌일 것이니 나는 그것으로 이 생에 여한을 두지 않을 것이오. 미안하고 미안하오. 내 살아 있는 단 한 날도 입속에 밥을 넣으면서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단 한 날도 헤어지던 날 그 어린 서희의 눈이 밟히지 않은 날이 없었소.


내 다시 태어 날 수 있다면 필시 당신과 서희의 종으로 태어나 다시는 떠나지 않고 매일 아침 그대들의 밥을 지어 바칠 것이오. 단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겨울이면 군불을 때서 따뜻이 하고 여름이면 물가의 그늘에서 시원히 할 것이오. 미안하오. 사랑하오. 부디 여생을 행복하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딸 서희. 못난 아비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마는 너만은 아비 같지 않은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나는 평생을 조국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네 아비로 살 수 없는 이유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진심으로 자랑스러운 아비가 되고 싶었지만 어찌 자식과 아내를 버린 비정한 남편이거나 아비가 되고 말았구나. 이 아비가 아무것도 주지 못해 너무 미안하고 미안하다.


하지만 서희야 이것 하나만은 내 딸로서 이 못난 아비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 아비는 너와 네 어머니에게는 한 없이 부끄러운 자이나, 너는 이 아비를 부끄러워하지는 말아라. 아비는 조선의 독립군이었고 단 한순간도 내 딸의 이름으로 부끄럽게 살지 않았다.


비록 해방이 되고 나서도 민족이 갈라져 생살을 도려낸 듯이 너와 네 어머니를 버려두고 온 비정한 남편과 아비였으나, 그것은 내가 너에게 부끄러운 것이지 네가 부끄러워할 것은 아니다. 너는 조선 독립군의 딸이다. 나는 부끄럽지만 너는 자랑스러워라. 나는 감히 이 민족의 혼이 있다면 너를 귀히 여길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하는 나의 딸 서희야. 미안하고 미안하다. 너와 헤어지던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단연코 총을 버리고 너를 업고 아무 곳에나 갈 것이다. 그래서 어느 산속이든 너의 아비로 행복하게 살 것이다. 이제 아비는 죽어서 이리 허망한 글을 남기지만 너는 부디 좋은 남자를 만나 자식들과 행복한 삶을 살아라.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못한 것이 이리 후회로 남느니 너는 마음껏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살아라. 사랑한다 나의 딸 서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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