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 유언

From 1919 to 2022

by 시드니


2003년 김대중 정부가 노무현 정부로 바뀌었다. 노무현은 훗날 ‘새 시대의 맏형이 되고 싶었으나 구시대의 막내가 되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랬다. 그는 정권 내내 구시대의 유물과 싸워야 했다.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이명박은 당선인이 되어 ‘대통령의 5년은 어땠나?’라고 묻자 ‘중간 평가 없는 대통령의 5년은 좀 길었다’라고 노무현은 답했다.


지수의 회사 이름은 ‘하루’였다. 지수는 효근의 여러 도움으로 어렵사리 사무실을 열 수 있었고, 직원들도 소개받았다. 왜 ‘하루’인가를 묻는 효근의 질문에 지수는 하루는 어제이고 오늘이며 또 내일이니 하루는 모든 날이 아닐까 라며 웃었다.


효근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은 지수가 알고 있던 그런 영화인들이 아니었다. 독립영화는 상업영화와는 결이 달랐고, 그들은 영화인이라기보다는 운동권에 가까웠다. 지수의 일은 그들의 생각이 필름이 되어 상영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돈을 주고 보는 관객이 없었으니 결국 지수의 일은 그 돈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 돈은 대부분 정부 차원의 지원금이었고, 지수는 그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을 구워삶아야 했다. 지수는 자신이 로비스트 기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놀랐다. 영화인들은 용감했지만 숫기가 없었고, 지수는 용감하지는 못했지만 거리낌이 없었다. 지수의 전략은 미인계였다. 얼굴이 이뻐서 미인계가 아니라 그냥 마주 보고 빤히 쳐다보며 해줄 때까지 웃으며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귀찮아하거나 면박을 주기도 했지만 지수는 그래도 꿈쩍 않고 버텼다.


지수의 큰 눈은 공무원들의 눈길을 붙잡았고, 지수의 눈길에 붙잡힌 공무원들은 이기지 못하고 결국 지수가 가져온 제안서를 승인해 주었다. 어쨌든 지수는 제안서를 들고 가면 그냥 오는 법이 없었다. 기어코 끝이 있어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차했지만 지수는 개의치 않았다. 구차함을 이겨내는 재주가 있다는 사실은 지수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지수의 제안서에 담긴 작은 영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지수가 이겨내는 구차함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날도 늦은 저녁이 되어 퇴근을 준비하던 지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국정원이라고 했다. 국정원이라는 말 한마디로 지수의 등이 꼿꼿해졌다. ‘무슨 일이지 우리 영화 때문인가? 할아버지 때문에 또 엮인 건가?’하며 그 짧은 순간에 지수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김지수 씨죠? 저는 국정원의 이태길이라고 합니다”

“네 그런데요. 무슨 일이시죠”


지수의 대답이 날카로워 있었다.


“하하 ~ 네 ~ 우선 저~ 종기랑 연수원 동깁니다. 크게 가깝지가 않아서 잘 모르실 거예요. 종기의 장례식장에도 가긴 했는데 멀리 있어서 아마 잘 모르실 거예요”

“아 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남편의 장례식장에도 오셨다는데 제가 큰 실례를 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 ~ 아닙니다. 당연히 모르실 건데요 뭐 ~ 사실은 그 일로 전화드린 건 아니고, 지수 씨 외조부께서 신종대 씨 되시죠?”


종기의 친구라는 국정원 직원의 말은 이랬다. 종대는 전쟁이 끝나고 평양의 도서관 관장으로 있다가 오래전 사망했는데, 평양에 있는 그의 자식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주며 언젠가 그것을 꼭 남쪽의 가족에게 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들은 남북경협으로 간 우리 측 인원에게 그것을 부탁했으며, 이를 전해받은 국정원이 지수를 찾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 네! 그랬군요. 그럼 국정원이 그 편지를 가지고 있나요?”

“그게 좀 ~ 우선 그 편지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직 평양의 가족들이 가지고 있고요. 어쩌다 보니 이게 남북 간의 공식적인 루트로 진행되고 있어서 먼저 우리 측에서 그 편지의 수령의사를 전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수가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연락을 받은 것은 지수였지만 서희와 종세에게 그 소식을 전하는 것 말고는 지수가 할 말은 없었다. 지수는 태길에게 부모님께 여쭤보겠다며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날 지수의 말을 들은 서희와 종세는 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평양에 종대의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종세는 서희의 눈치를 살폈다. 서희는 내내 아무 말도 없다가 지수에게 물었다.


“언제 돌아가셨다니?”

“모르겠어 엄마. 너무 갑작스러워서 미처 못 물어봤어 ~”

“그랬구나. 그래서 그 편지를 받으려면 어찌해야 한다는 거야?”

“우선은 그 편지를 우리가 받고 싶은지를 알려줘야 한데. 어쩌다 보니 이게 공식적인 루트로 되다 보니까 절차가 좀 있나 봐”


서희는 잠시 아버지가 그 전쟁통에 자신과 엄마를 버리고 가 놓고는 북에서는 새살림을 차렸다는 것이 미워 종대의 편지를 받지 않겠다고 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깐이었고, 아버지가 남긴 편지가 있다는 말에 종대와 헤어진 뒤 분옥의 손을 잡고 헤맨 그 모진 세월이 서럽고 또 서러웠다.


“북에서는 이 일을 좀 선전용으로 사용하고 싶어 하는 눈치입니다. 지수 씨 가족에게 북측 가족이 그분의 유품을 전해주는 장면을 호의적으로 그리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우리 쪽은 그런 북측의 의도에 말리고 싶지 않고 뭐 그래서 입장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좀 뭐하게 되어버렸어요”

“그러면 국정원은 우리 가족이 할아버지의 편지를 거부하기를 바라는 건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우선 지수 씨 가족의 의사가 확인되면 북측하고 절차를 논의할 예정입니다”

“이게 그렇게 복잡하게 진행할 문젠 가요? 그냥 편지만 주고받으면 될 것 같은데 ~ ”

“글쎄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마도 북쪽에서 지수 씨 할아버지의 위치가 있다 보니 그것을 선전용으로 쓰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이렇게 한 번 해보죠. 태길 씨!”


지수가 태길에게 한 제안은 이랬다. 북한이 이 일을 선전용으로 쓰겠다고 하면 그리 하라고 하자. 그 대신 우리도 이 일을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하자. 지수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영화인들을 알고 있으니 지원해 주면 충분히 북쪽에 밀리지 않을 것이다.


“지수 씨! 종기가 갑자기 그렇게 되고 나서 친구들이 지수 씨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괜한 걱정이었네요.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지원해 드릴 테니 지수 씨 생각데로 한번 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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