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 사랑 뒤에 사랑

From 1919 to 2022

by 시드니


“그러게 내가 찾아가지 말라 그랬잖아요”

“어쩔 수 없었어요. 순이 언니한테 너무 미안한 게 많아서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요”


“그게 그래요. 그런 어둠은 한번 갇히면 빠져나올 방법이 없거든요. 사실 여기 정보부 사람들도 그래요. 허구 헌날 남의 어두운 부분만 억지로 들여다보다 보면 어느새 그런 어둠 속에 자기도 모르게 쑥 하고 빠져들거든요. 그러고 나면 아무리 유능해도 헤어 나오기 힘들어요. 어쩌면 그들과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은 셈이지요. 그래서 지수 씨가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 겁니다”


“그런 생각인 줄은 몰랐어요. 미안해요. 태길 씨에게 괜한 걱정을 드렸네요”

“허허허 ~ 그런 말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순이 언니한테는 어떻게 말했어요?”


“숙희랑 며칠을 고민했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사실대로 말하고 그쪽이 원치 않아서 연락처를 받지는 못했다고 했어요. 순이 언니도 더 이상 묻지 않더라고요.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내가 눈물이 났어요”


“지수 씨! 그건 그렇고 지수 씨는 이렇게 계속 혼자 살 거예요?”

“네?”


태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수가 놀랐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수 씨가 혼자된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잖아요. 지수 씨 나이도 이제 마흔이에요.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 살 수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게 태길 씨랑 무슨 상관이에요!”


지수가 정색을 하고 태길에게 쏘아붙였다. 태길은 순식간에 꼿꼿해진 지수를 바라보며, 빨개진 얼굴로 지수를 바라보다가 머뭇머뭇 말을 이어갔다.


“지수 씨는 관심도 없었겠지만, 저도 혼자 살고 있습니다. 검사가 되고 나서 유명한 검사집안 딸하고 중매결혼을 했었어요. 근데 너무 안 맞아서 일 년도 못 지나서 이혼했습니다. 그 뒤로 종기가 청와대로 파견 나간 해에 나도 국정원으로 파견을 나왔는데, 그 집안이 있는 검찰로 돌아가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국정원에 눌러앉았어요”


“그러다가 지수 씨 외할아버지 일로 지수 씨를 만나게 된 거죠.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나는 사실 종기가 부러웠어요. 종기는 거리낌이 없었거든요. 지수 씨 집안의 내력을 알고도 아무 거침없이 지수 씨와 결혼하는 것을 보고, 사람이 겁이 없는 건지 거침이 없는 건지 아무튼 부러웠어요”


“그래서인지 종기가 그렇게 되고 나서 한 번도 지수 씨를 잊은 적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그동안 지수 씨에게 연정을 품고 지냈다는 건 아닙니다. 그냥 아득하고 아련한 감정만 마음속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일로 지수 씨와 연락이 되니까 너무 놀랍기도 하고 사실은 너무 좋았어요”


“그래도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지수 씨에게 그런 마음을 보인 적은 없었어요. 매일 한 시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그런 내 마음이 불순해 보이기도 하고 스스로도 그게 진심인지도 알 수 없어서 매일매일 혼자 묻고 답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확신이 섰어요. 저 지수 씨 사랑합니다. 이거 정말 힘들게 말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 뭘 하자는 건 아니에요. 날 그저 날 남자로 봐주기만이라도 해 달라는 겁니다. 우리 아직 젊어요. 그런데 곧 늙을 겁니다. 진짜 아까운 시간아닙니까. 뭐가 되었든 이 소중한 시간을 지수 씨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태길은 말을 마치고 차마 지수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수도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고, 두 사람의 어색한 침묵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어쨌든 그리 생각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동안 태길 씨가 그렇게 도와주지 않았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사실 그 사람이 그리 되고 나서 남자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어요. 수진이랑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하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던 것 같아요”


“태길 씨 말씀이 고맙기는 한데, 저는 태길 씨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미안해요. 저한테는 남아있는 사랑이 없는 것 같아요. 미안해요. 먼저 일어날게요”


일어나려는 지수의 손을 잡고 태길이 말했다.


“지수 씨 ~ 사랑 뒤에 사랑이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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