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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날까지 행복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

by 이보


몇 날 며칠을 바삐 달려오던 일상 중 쉼의 하루, 우연히 스마트폰 화면에 떠오른 기사를 읽었다.


한강 둔치에 홀로 남겨진 휠체어, 그 곁에 놓인 슬리퍼 한 켤레, 그리고 강물 속에서 발견된 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사람이 떠났다’는 사실보다, 그 어머니가 끝내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스스로를 밀어 넣었을 심정을 상상하는 순간, 가슴께가 서늘하게 저려왔다. 한참을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20250526_105107.jpg 중앙일보 2025.5.25. 자 사회일반 "딸은 다 알면서 담요 던졌다.."한강에 가자"엄마의 죽음. 보도내용 발췌



살다 보면 우리는 누구나 “아프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그래서 주말마다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농약 한 방울 묻지 않았다는 채소를 찾고, 원산지 인증표를 달고 있는 음식점에 일부러도 찾아 기꺼이 지갑을 연다. 하지만 아무리 땀을 흘리고, 아무리 좋은 음식을 골라 먹어도, 생은 언젠가 벽처럼 다가와 멈춘다. 그렇다고 해서 운동과 식단을 포기할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그 사소한 실천들은 ‘언제 끝날지 모를’ 하루를 조금이라도 길고 단단하게 살아내려는 몸부림이기에 더 소중하다.


인간이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 종(種)을 이어 가게 만드는 비밀스러운 설계일지 모른다. 만약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과연 인류는 지금처럼 서로 기대어 살 수 있었을까. 누군가 떠나기에 우리는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애쓰고, 다시 사랑하고, 또 새로운 생명을 품는다. 그 순환이 이어지는 한, 고통조차도 ‘살아 있음’의 증거가 된다.


하지만 기사 속 어머니처럼, 때때로 고통은 삶의 의미를 삼켜 버릴 만큼 거대해진다. 밤마다 찾아오는 통증, 쉴 새 없이 불어나는 치료비, 그리고 “괜찮다”는 말만 되뇌는 딸의 얼굴. 말기 암이라는 두 글자가 던져 준 현실 앞에서, 어머니는 살아 있다는 것이 더는 축복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고 싶던 한 생이, 마지막에는 가족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 스스로를 몰아넣은 그 절망. 그 마음을 상상할 때면,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의 비극으로 간신히 배운다.


행복이란 결코 혼자만의 의지로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생의 끝에 닿기 전까지,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나누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픈 이를 돌보는 제도가 더 촘촘해져야 하고, “괜찮다”는 단순한 위로 대신 실질적인 돌봄이 닿아야 한다. 스스로를 떠밀지 않아도 되도록, “살아 주셔서 고맙다”는 말이 두려움보다 먼저 귀에 들리도록.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유한함을 핑계로 오늘을 놓아버릴 수도, 반대로 한순간을 위해 전부를 걸 수도 있다. 나는 후자를 택하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화 끈을 다시 조여 매고, 신선한 채소 위에 참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사소한 의식들이, 언젠가 찾아올 종착역 앞에서도 내 삶을 빛나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우리는 사는 날까지 행복하려 애써야 한다. 그 행복이 거창한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뜨거운 국 한 숟가락에 목이 넘어가며 “살아 있구나” 느끼는 순간, 잘 익은 복숭아 한입에 여름의 태양을 맛보는 순간, 지는 노을 앞에서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손을 맞잡는 순간이면 충분하다.


언젠가 나도, 당신도, 더는 운동화 끈을 묶을 수 없는 시간이 올 것이다. 그때를 두려워하기보다, 오늘 내 발목을 감싸는 이 끈이 풀리지 않도록 단정히 매고, 내일도 또 묶으려고 애쓰는 쪽을 선택하자. 필멸이라서 슬프지만, 필멸이기에 가능한 기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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