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책한권
맨부커 상을 수상한 한강의 "채식주의자"
온나라가 난리가 났었다. 읽어봐야겠다고 다짐만하고 읽지 못하다가, 우연히 교보문고에 들러 필요한 책을 둘러보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다.
1시간만에 읽고, 나름의 해석을 한후 이 소설에 대한 해석을 제대로 한 평론이 있을까 싶어 찾아봤지만
온통 난해한 말로 된 해석뿐,
내가 이해되는 말로 쓰여진 것은 없었다.
원래 문학이야 말로 열려진 결말을 기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아마추어인 내가 내멋대로 쓴 해석을 올려보겠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유의)
줄거리
주인공 영혜는 어느날 갑자기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육식을 먹기를 거부한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영혜의 식구들은 그녀에게 고기를 먹일 생각에 여념이 없다.
영혜의 언니, 형부, 아버지 등 식구들이 모인날, 영혜의 아버지는 탕수육을 영혜의 입에 쑤셔넣으려하고 이를 거부한 영혜는 칼로 자해를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이후 소설은 영혜의 형부, 그리고 언니인 인혜의 시점으로 두차례 바뀌면서 이후의 사건들을 이야기 한다.
소설에서 다루어 지는 육체에 대한 3가지 금기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육식을 먹지 않는다는 금기에 도전하는 일이다. 그래서 영혜는 채식주의자로 온전히 살수 없다. 그것이 그녀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소설에서 말하는 첫번째 금기에 도전하는 영혜이다.
두번째는 객체가 되버린 사람의 육체이다. 그녀의 몸은 꽃이 그려진 도화지가 되고, 예술에서 관람되어야 하는 무언가가 된다.
세번째는 자살이다. 영혜는 괴로움에 칼로 몸을 긋고 식사를 거부하면서 서서히 말라죽길 선택하지만 그마저도 사람들이 하지 못하게 하기에 할 수 없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가?
나는 작가가 우리 몸에 대한 선택권이 박탈당한 현대 사회를 금기를 행하고 있는 영혜라는 여성의 몸을 통해서 비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몸은 우리 자신들의 육체뿐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 또는 자유가 부여되었다고 '믿고 있는' 개인들 모두를 상징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에 관한것을 과연 진정으로 선택할 수 있는가?
나의 몸인데,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 슈퍼마켓 백화점 대형마트에는 온갖 먹을 것이 널려있는데 광고, TV프로그램, 심지어 블로그글까지 내가 권하는 것을 먹으라고 (반강제적으로) 권유하고 있다. 사람들은 몸에 좋은 것을 먹으라고 하며 우리는 다이어트를 해야한다고 한다는 강박증에 의해 어떤 음식을 고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고민을 한다. 그리고 내려놓는다.
금기라고 하나 이미 그 금기들은 아이러니 하게 다른 일상적인 단어들로 둔갑하여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채식주의자는 다이어터로, 현대예술은 인간의 몸을 객체로 자주 사용하며, 자살율은 매년 높아져가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 엿보이는 것은 영혜는 주체적으로 선택을 하고 있는 점이다. '식물성'에 가까운 그녀는 누구보다 강하게 채식주의자 임을 선언하고 몸에 그려진 꽃에 매혹되며 스스로 말라죽기를 '선택' 한다. 아버지 및 남편에게 저항 (가부장에의 저항) 하고 이혼당하고 버림받고 남편 상사들과의 식사자리에서도 육식을 거부 (권위에의 저항) 하며 친언니가 말려도 정신병원에서 서서히 죽어가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한 자의 용기, 즉 "식물적 저항" 은 자주 세상과 부딫히고 충돌을 일으키고
저항하는 자의 몸과 마음은 망가져 간다.
하지만 실금이 가듯, 담쟁이 덩쿨이 퍼져나가듯 미세하게 세상을 천천히, 느리게 변화시킨다.
흥미진진하게 채식주의자를 1시간동안 읽었다. 이 책은 환상적이기도 하며, 재미있고, 잘 읽힌다.
많은 사람들의 해석이 나와서 이 책을 다시 제대로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