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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an 03. 2024

빠를수록 잃어가는 것들

버스 탈 일이 없었던 초등학생 시절, 나는 외갓집 가는 것이 좋았다. 8번 버스를 타고 40분을 가야 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차 창밖의 풍경은 새로움으로 가득했다. 걷거나 달리지 않아도, 네모난 창틀은 매 순간 다른 장면을 보여주었다. 옆에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표정도, 복장도 하나 같이 보던 것이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면 또 다른 모험이 시작되었다. 점심 즈음에 도착하면, 새벽에 열렸던 큰 시장의 흔적들이 날 반겨주었다. 바닥에 여러 사람들이 밟아 납작해진 배추이파리를 뒤로한 채, 큰 도로를 하나 건너면 큰 건물 4층에 외갓집이 있었다.


주변에 있었던 오락실, 사촌누나가 데리고 갔던 퐁퐁(트램펄린) 타는 곳, 조그마한 놀이터, 아주 작은 골목 사이에 위치했던 큰외삼촌 금은방과 그 시절의 286 컴퓨터, 그 골목에 있었던 지하로 내려가는 또 다른 오락실. 매번 갔었지만, 그다음에 다시 갈 때쯤에는 모두 잊은 채 또 모험을 했다. 


코찔찔이 시절, 버스는 새로운 모험지로 인도해 주는 마법터널 같았다.




출근시간. 차에 시동을 건다. 차창에 낀 성에를 제거하기 위해 따뜻한 바람을 틀고 기다린다.  자동차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조금씩 사라지는 성에 틈 사이로 비추인다. 드문드문 난 흰머리. 조금씩 패이는 주름. 어린 시절 해맑게 웃던 아이는 온 데 간데없고, 즐거움이 조금씩 사라질 나이에 접어들고 있다.


차창밖은 여전히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창밖 풍경에 관심이 없다. 핸들에, 표지판에, 차선에, 다른 차들에, 신호에, 보행자에 주의를 기울인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노선을 보며 목적지 도착시간에 눈을 힐끔힐끔 거린다. 빨리 도착해서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가득 찬다. 흔히들 하는 말처럼 도로 위에서 시간을 버리고 있는 것 같다.


미팅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가는 길. 감전동 새벽시장을 지난다. 시장에서 뛰어놀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문득

속도를 얻은 만큼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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