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 2학년 시절, 나는 주말마다 부산 해운대에 있는 약국에 출근했다.
부산대학교 기숙사에서 한 시간정도 버스를 타고 이동해, 토요일 오전이면 하얀 가운을 입고 문을 열었다.
사실, 그 시기에는 공부와 일, 두 마리 토끼를 쫓느라 마음의 여유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해운대 그 약국은 이상하게도,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공간이다.
어느 날은 TV 프로그램 촬영팀이 갑작스레 약국에 들이닥쳤다.
‘해운대의 명물 약사’로 소개되며 인터뷰를 하게 됐고,
방송이 나간 날은 출근하자마자 "TV에 나온 분 맞죠?"라는 인사부터 받았다.
그 약국엔 어린 소녀들이 피임약을 사러 자주 왔다.
주저하며 카운터에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약국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천천히 말을 건넸다.
“괜찮아, 누구나 처음은 어려워.”
외국인 손님도 많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곁들여 무언가를 손짓하는 사람들.
몸짓과 표정으로 약을 추천하던 그 순간엔, 약사라기보다 작은 외교관 같기도 했다.
약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잠깐 도시락을 먹을 때였다.
점심시간도, 화장실도 자유롭지 않았던 그 바쁜 약국에서 나는 매 순간 ‘사람’을 배웠다.
어느 날은 할아버지가 박카스를 들고 와서 “이거 할인 안되나?”라며 깎아달라 하셨고,
또 어떤 날은 화가 난 손님이 잔돈을 그대로 카운터에 던지고 나가버렸다.
그 모든 순간을 지나며 깨달았다.
약국은 ‘약’을 파는 곳이 아니라 ‘인생’이 들락거리는 공간이라는 걸.
그런 시간들이 쌓여서일까.
지금 나는, 법을 공부하고 사람을 돕는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때의 약사님들을 기억한다.
짧은 점심시간에 쪽잠을 자던 모습, 환자의 한숨에 함께 한숨을 쉬던 마음.
그래서 요즘 나는 약사님들을 위한 법률 가이드북을 쓰고 있다.
그저 법만 아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아서.
그저 자격증만 내세우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약국’이라는 가장 치열한 현장에서 당신의 고단함을 보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고단함을 이해하고 지켜줄 수 있는 법률가로, 당신 편에 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