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12
여러 변호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내 사건에 대해 제삼자의 판단과 조언을 듣고 싶었다. 여러 명과 상담하고 이야기를 듣다 보면 대략적으로라도 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전문가에게 제삼자의 의견을 받아보자.”
어플 ‘로톡’에서 검색해 알게 된 성범죄 전문 변호사들이 있었다. 그 어플에 올라와 있는 상담요청글들, 나와 비슷한 사례들을 읽고 변호사들이 달았던 댓글을 모두 읽어보았다. 가장 나를 잘 도와 줄 것 같은 변호사가 있었다. 바로 전화 상담 신청을 했다.
전화가 연결되었다. 내가 그때까지 겪어왔던 일들을 말과 글로 쭉 설명했다. 변호사는 내 이야기를 듣고선, 나를 안심시켰다.
“제가 통상 진행하는 성범죄 피해자들 중에서, 가장 초도 대응을 잘 한 케이스입니다. 사건 발생하자 마자 신고 했기 때문에 논리도 확실하고, 증거 확보까지 했으므로 불리한 사정이 없어요.”
다만 가해자의 말바꾸기가 계속 되는 걸 보아하니 끝까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그 예상은 나중에 적중했다.) 그러나, 그가 지리하게 억지를 쓰며 싸움이 길어진다 해도 걱정하지 말라고, 승산이 매우 높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경찰 수사관이 철저하게 조사하고 따지는 것도 나중에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걱정 마시고 마음 잘 추스리세요.“
그녀는 덧붙였다.
그 때 즈음이었다.
수사관에게 연락이 온 게.
“피의자가 대질신문을 원하는데 피해자의 의견을 알려주십시오.”
그가 피해자를 경찰서에서 직접 만나서 따져 보겠다는 거였다. 그를 다시 대면한다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났다.
“내가 그를 직접 만나 그의 말을 듣고 있어야 한다고?”
변호사에게 연락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가해자의 대질신문 요청 얘기를 듣더니 매우 어처구니 없어 했다. 그녀는 흘리듯 말했다.
“아유, 아주 악질이네...”
변호사는 이차 가해가 예상되는 대질신문을 거부하고 그렇게 본인이 억울하면 쌍방이 거짓말 탐지기를 하자고 의견서를 써줬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 탐지기를 거부했다.
그는 거짓말탐지기를 하는 대신, 회사 내 본인이 친한 동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는 억울하다며 하소연 했다.
“이건 다 음해야. 명예훼손으로 맞고소 할거니까 두고 봐.”
그 술자리에는 가해자의 절친이었던 인사팀장과 내 소속팀장이 있었다.
며칠 후,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병가를 연장하려면 2차 병원 이상인 상급병원에서 진단서를 떼 오라고 했다.
“얼마 전까진 동네 정신과 의원 진단서를 인정했지만, ‘규정상’ 이제는 편의를 봐줄 수 없습니다.”
그래, 규정대로 하자는 거구나.
전의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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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often the last key in the bunch that opens the lock.” -Anonymous
자물쇠를 여는 열쇠는 종종 마지막에 있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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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시는 분들께*
이 시리즈는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정주행 추천드려요.
1화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aylagrace/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