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14
회사는 가해자를 피해자와 매일 일하는 유관부서에 발령 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그 발령 내역은 진짜였다. 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오른쪽 귀에서 삐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메일 쓰기를 눌렀다. 수신인에 법무팀장과 인사실장, 그리고 CEO를 넣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많은 이차 가해와 음해에도 그간 참아왔지만 이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습니다. 가해자를 피해자 유관부서에 발령하다니요? 이 메일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정말 괴로운데, 가만히 있으면 이 발령을 묵과하는 것이 될까 봐 힘을 내어 메일을 씁니다.“
메일 송신을 누르기 전 잠시 망설였다. 나는 이제 대기업의 CEO에 직접 메일을 쓰고 있었다. 순간, 사람들이 수근거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 피해자 있잖아, 사장님한테까지 메일 썼잖아……”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이걸 해내야 한다고 위로했다.
“해낼 수 있어. 여기서 침묵하면, 이 침묵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지 않아. 오히려 너도 그때 가만히 있지 않았냐며 내 발목을 잡을 거야.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메일 송신 버튼을 눌렀다.
오히려 마음이 다소 편안해졌다. 그러나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수면제를 먹었다. 그럼에도 잤다 깼다 악몽에 시달리다 아침에 일어났다. 새로온 메일함에 회신 메일이 와 있었다.
사장님이었다.
“대표이사로서 너무 미안합니다. 미처 챙기지 못했었네요, 상처받는 일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말이 진심이길, 앞으로는 덜 아플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오후가 되었다. 법무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지치고 화난 목소리였다. 아마 하루 종일 관련해서 내용을 파악하고 경영진에 보고했겠지. 내가 제기한 문제로 본인의 일거리가 많아져서? 아니면 내 메일 때문에 사장에게 한소리 들어서였을까?
“가해자를 공장으로 발령냈으니 법적으로는 이 분리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해자를 받아주는 부서도 없고 인사팀에서도 애로사항이 많아요, 가해자의 커리어도 고려해야 하구요.“
“가해자의 커리어” 라는 말이 도대체 누구 입에서 나왔을까? 아마 인사팀이겠지. 그는 누군가에서 들은 그 단어를 나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제가 담당하고 업무하는 같은 사업부에 가해자가 있는데 어떻게 이걸 분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지금 재발령은 바로 내는 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과장님 병가가 끝나고 복직 시점이 되면 그 때 가해자를 재발령 내겠습니다. 괜찮습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냐고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간간히 좋은 소식은 있었다. 다음 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경찰 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000님,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결과를 우편으로 보내드릴까 해서 전화드렸어요.”
“네 물론입니다. 혹시...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피의자의 “혐의 있음”이 인정되어 검찰 송치로 결정하였습니다. 결정문은 우편으로 다시 받으실 겁니다.“
“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를 그렇게 치밀하게 검증하던 수사관이었지만 일은 확실하게 잘 한 모양이었다. 예전 내가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추진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 과정에서 나에게 많이 들볶이던 후배가, 프로젝트 완료 후 나에게 말했었다.
“냉정하고 깐깐하셔도, 일은 참 잘하시네요.“
나에겐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 수사관도 그런 분이었다.
—
“Every day may not be good. but there is something good in every day.” -Alice Morse Earle
모든 날이 좋을 수는 없지만, 모든 날 안에 좋은 무언가는 있습니다.
—
*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신 분들께
이 이야기는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정주행 추천드려요.
1화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aylagrace/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