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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매일같이 일하는 부서에 가해자가 발령났다.

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13

by 찬란

시간은 지리한 듯 빠른 듯 흘러갔다.


인사팀에서 요구하는 대로 2차 상급병원을 찾고 예약해야 했다. 대학병원 교수님을 알아보고, 그분과 정신과 초진을 예약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 군데 전화와 메일로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천사들은 있었다. 내 사정을 듣고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교수님을 처음으로 만나기 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교수님은 내 이야기를 들었다.


“상황은 안타깝지만 초진에 바로 진단을 해줄 수 없으니 여러 검사와 함께 계속 진료를 해봅시다.“


이후 공황 발작이 두어 번 왔다. 연예인들만 겪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게 나에게도 왔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뛰고 호흡이 되지 않고 어지러웠다. 그동안 나는 괜찮다고,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아니었다.


그가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다음 날이었다. 신문에서 신림역 사건과 성범죄 보복 살해 기사를 봤을 때였다. 가장 큰 공황 발작이 찾아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침대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견뎠다.


한참 후 남편이 집에 오자 그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남편은 이 모든 과정에서 단단하게 나를 안고 버텨주었다. 남편은 나만큼 화가 나고 절망했을 텐데 한번도 내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분노할 때 차가워지는 사람이었다.


“걱정 마. 당신은 강해. 우리는 할 수 있어.”


나와 친분이 없음에도 도움을 주던 사람들은 많았다.


산재 담당자님, 그분은 상급 병원을 알아보던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녀는 최대한 조력해 주겠다고 약속해주었다.


“정말.. 너무 힘드셨겠어요, 진료 예약 제가 어떻게든 도와드릴게요.”



센터 상담원님, 나의 이야기에 함께 분노하고 회사 이름을 알려달라 요청했다.


“그 회사 정말 이상하네요.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요? 나중에라도 꼭 알려주세요.“



변호사님, 그의 어처구니 없는 궤변을 논리로 격파해 주었다.


“걱정마세요. 이건 말도 안되는 주장입니다. 제가 의견서로 보완하겠습니다.”



그리고 작가와 유튜버, 힘든 일을 잘 극복해서 다시 행복해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 죽을만큼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극복할 수 있었고 다시 행복해질 수 있었어요.”



힘든 일이 있었지만 그걸 잘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가슴이 뭔가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도 잘 극복해서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거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잘 끝나고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멋지게 극복해보자,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내가 겪었던 이 모든 일이 억울하지 않게 될 것 같아.”



교수님은 여러 검사를 종합해 나에게 중증 우울증과 적응장애 진단을 내렸다.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를 첨부해서 병가를 내기 위해 사내 인트라넷에 접속 했다. 그때였다. 인사 발령 게시판에 눈에 띄는 공지가 보였다. 그의 이름이 보였다. 정직 3개월이 끝나고 난 후, 그가 공장 00부서에 발령이 난 것이다.


나와 매일 같이 같이 일하는 유관 부서였다.


믿을 수가 없어 발령 내역을 보고 또 보았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눈을 비비고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나랑 같이 일하는 부서에? 회사 안에 100개나 되는 팀이 있는데 하필?”


새로 온 메일함에 들어가 보니 나에게 방금 새로 온 메일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와 업무를 논의하자는 그 유관 부서 팀장의 메일이었다.


“00과장님, 저희 팀과 업무 협조를 요청해야 해서 연락드립니다....”



회사는

가해자를

피해자가 항상 함께 일하는 유관 부서에 발령 냈다.





“Sometimes, carrying on, just carrying on, is the superhuman achievement.” -Albert Camus

때로는 그저 계속 살아내는 것, 그것만으로도 초인적인 성취입니다.





*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신 분들께*

이 이야기는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정주행 추천드려요.

1화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aylagrace/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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