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15
가해자가 강제추행 혐의로 경찰조사 결과가 나와서 검찰에 송치되었음을 회사에 알렸다. 배정 검사실을 확인했고 검사실에서도 “기소하였다”고 연락이 왔다. 약식 기소가 아닌, “불구속 구공판”으로 결정되어 진행하겠다고 했다.
(불구속 구공판: 검사가 피의자에게 유죄가 인정된다고 판단, 구속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에 회부하는 것으로 피의자는 피고인으로 신분이 변경되고, 법정에 출석하여 재판을 받게 된다. 구공판이 아닌 약식기소로 진행하는 경우 거의 ‘벌금형’이지만, 구공판은 대부분 ‘집행유예’ 이상의 구형을 한다.)
변호사는 담담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검사실에서 강제추행을 기소하여 약식기소(벌금형 청구)가 아닌 불구속 구공판을 진행한다는 것은 검사실에서도 사건을 위중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통계적으로도 유죄 가능성 99% 라고 봅니다.”
원래 검사실에 사건이 밀려 있는 경우 기소 절차만으로도 수개월, 길게는 일년이 걸리기도 한다. 내 사건은 다른 사건 대비 기소 절차를 빨리 진행해 준 것으로 보였다. 감사했다.
킥스(형사사법포탈)라는 어플을 통해 나의 사건 진행현황을 조회할 수 있었다. 사건 번호를 매일 눌러 들어가 확인했다. 어느날 들어가 보니 내 사건이 ‘불구속 구공판 검사 처분 완료’로 조회되었다. 시스템에 처분 내용이 반영되자 이제 실감이 났다.
그날, 처음으로 수면제 없이 잠을 잤다.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은 번갈아 찾아온다.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가해자가 정직 3개월이 부당하다며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징계 관련 진정을 냈다. 자신의 징계가 과하다고 노동위에 신고한 것이다. 이제 그의 상대는 회사 법무팀이었다. 그와 회사는 노동위에서 다투었고, 가해자의 진정은 최종 기각되었다. 회사는 그 과정에서 가해자에 대응하기 위해 내가 제공한 여러 자료들을 사용했다. 검찰 송치문, 고소장 등등.
“노동위에서 가해자한테 대응하느라 회사에서도 일이 많아 진짜 힘들었어요.”
법무팀장은 하소연했다. 로펌을 고용하여 가해자의 기각청구 논리에 대응하느라 힘들었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이 진화된 가해자의 주장을 전해 듣게 되었다. CCTV가 있어 사실관계는 부인할 수 없으나 그는 격려차 만진 것 뿐이고 ‘당시 피해자도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정리하면, 가해자의 주장은 이렇게 변천했다.
“기억이 안난다.” ⮕ (피해자가 일관되게 주장) ⮕ ”그런 일 없었다, 피해자가 거짓말을 했다.“ ⮕ (CCTV 발견) ⮕ “거의 만지지 않았고 격려차 살짝 두드렸다.” ⮕ (더 심각하게 만진 CCTV 추가 발견) ⮕ “만진 거 맞다. 그런데 사실은 피해자가 먼저 다가왔고 기분 안 나빠했다.”
법무팀장은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일심 판결이 나오자 마자 해고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도대체 왜요?”
“가해자를 해고해도 또 부당해고 진정을 넣으면 어떻게 합니까, 만에 하나 해고 후 복직할 수도 있고..그리고 이번 노동위원회 판결문은 공유해 줄 수 없습니다.“
“그건 또 왜요?”
“이제 회사는 당사자 간 형사재판에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해자에게 들볶여 노동위에서 일을 많이 한 게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랑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았나?
그래서 ‘정보공개청구‘를 했다. 노동위원회의 기각결정문을 당사자 피해자인 내가 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정보공개청구: 공공기관의 정보 열람을 요청하는 것으로, ‘정보공개포털’에서 가능. 청구내용, 참조문서, 공개 수령방법 등을 작성하여 접수하면 관할 관공서를 통해 열람 가능함)
조사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사건을 담담하게 설명하며 내가 그 서류를 보지 못할 이유가 있냐고 했다.
“판결문 공개를 요청하셨죠? 그 사건의 형사재판 피해자 당사자시고요.”
“맞습니다. 가해자가 부당징계를 신고해 최종 기각되었습니다. 제가 그 서류가 있으면 피의자의 반성 없음을 재판에 증거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 뒤, 정보공개청구는 인용되었다. 나는 바로 판결문을 얻을 수 있었다.
“도대체 가해자가 뭐라고 주장했을까.”
지방노동위원회에서 그의 진정을 기각한 내용을 읽어봤다.
아주 가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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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imes we are tested not to show our weaknesses, but to discover our strengths.” -Anonymous
때로 우리가 시험을 받는 이유는 약함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함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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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신 분들께*
이 시리즈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1화부터 정주행 추천드립니다.
1화부터 읽기 : https://brunch.co.kr/@laylagrace/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