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의 라면 단상

저럽게 귀엽지만 않았어도.

by 찬란


“파인애플, 라면 먹을래?”

“라면? 학생식당에서?“

”어……“


숫기 없던 남자가 어렵사리 꺼낸 말이 귀했다. 나는 그를 좋아했다. 잘생기고 키도 크고 조용했다. 그는 여자들 꽁무니를 쫓아다니지 않았다. 항상 구석에 앉아 뭔가를 공부하고 있었다. 타고나길 마이너한 취향이었던 나는 이상하게 그에게 관심이 갔다. 어쩌면 그 순간 그를 간택했는지도 모른다.


”안녕? 같이 수업 듣네, 뭘 그렇게 공부해?“

”……“


내가 말을 걸면 그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허둥대며 눈을 내리깔고는 뭐라뭐라 대답하는데 알아듣기가 힘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뭐라고?“ 라며 깔깔대면 그제서야 나를 조심스레 바라보며 내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좋았다. 무해했다. 절대로 나를 해치거나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꾸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도 거기 앉았네, 지정석인거야?“

”나 지난 수업 노트 좀 빌려주면 안 될까?“

”지금 교수님이 뭐라고 하셨어?“


그를 향한 질문이 반복되자 점차 나의 질문에 대답하는 그의 모습이 자연스러워졌다. 여전히 눈을 마주치는 건 쉽지 않았지만 내가 조금씩 익숙해지는 모양이었다. 그의 노트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온갖 수학기호와 수식들이 가득했다. 내가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그는 땀을 흘리며 열심히 설명했지만 도통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가르치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학기가 끝날 때 쯔음 그는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라면 먹을래?“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라면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진라면은 무난하지만 뭔가 국물에 얼큰함이 덜 한 느낌이고 신라면은 너무 매워. 너구리는 면이 너무 굵어서 손이 잘 안가. 나는 그래서 안성탕면이 좋아.“


놀랍게도 그는 라면에 대한 지론이 있는 사람이었다. 안성탕면이라니. 이 사람도 상당한 마이너 취향이구나. 안성탕면이 최애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마주 앉아 면발을 후후 불며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학생식당에서는 김치와 밥을 마음껏 가져다 먹을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라면론에 흥미로워진 나는 유도 질문을 했다. 수줍은 패널을 인터뷰하는 유재석이 된 것 같았다.


”그럼 라면 먹을 땐 계란은 어떻게 해? 풀어서 먹어 한 번에 먹어?“

”그건…뚝배기에 나오는 경우는 금방 익으니까 아껴뒀다가 나중에 먹어. 그런데 내가 끓일 때는 그냥 휘저어서 풀어 먹어.“

”오, 그럼 안성탕면에는 무슨 김치가 제일 잘어울려?“

”라면에는 나는 깍두기가 제일인 거 같아.“

”그래? 난 파김치 너무 좋아하는데, 엄마가 여수에서 주문하는 게 있거든. 근데 냄새 나고 입에 묻을까 많이 못 먹어…“

”우리 둘 다 마이너한 취향이네.“

”그러게. 크하핫…“


그는 라면에 대한 모든 질문에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다른 주제라면 바로 막혔을텐데. 평소에 라면 관련한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분명했다. 라면 면의 익힘 정도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는 나를 보며 처음으로 웃었다.


하. 저렇게 귀엽지만 않았어도.


스스로의 생각에 조금 민망해졌다. 그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나에게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 그렇게 라면남과 나의 짧은 썸은 끝이 나나 보다 싶었다.






“엄마, 라면 끓여줘.”

“라면? 또? 라면은 질리지도 않니?”

“라면은 먹어도 먹어도 맛있어.”

“도대체 남자들은 왜 라면에 환장하는거야?”


8살 아들은 라면을 처음 입에 댄 그 순간부터 라면과 사랑에 빠졌다. 스테이크도 랍스터도 그를 정복하지 못했지만 라면은 그걸 해냈다. 어느 날 아들은 세상에서 라면을 먹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노라 고백했다. 아들은 내가 ‘뭐 먹고 싶어?’ 라고 물으면 항상 똑같이 대답했다.


“라면!!!!”


나는 기가 차서 웃어버렸다. 아들을 임신했을 때가 생각났다. 뱃속의 아들은 아주 거세게 나를 괴롭혔다. 하루는 입덧이 너무 심해 노란 위액까지 토하며 드러누웠다. 울며 토하는 나를 보던 남편은 안절부절 못 하더니 나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라면을 끓여왔다.


“세상에…입덧하는 사람한테 라면을 먹으라고?”


예민해진 임산부는 성질을 내며 돌아누워버렸다. 날뛰는 태아와 호르몬에 지쳐 눈물이 펑펑 쏟아지려던 차였다. 등 뒤에 개미 기어가는 것 같은 남편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라면 말고는 뭘 먹어야 맛있을지 생각이 안나서…”


기가 찼다. 너무 기가 차니 웃음만 나왔다. 이 남자는 그저 라면돌이야. 라면 말고는 뭐가 맛있는지 생각도 못하는. 세상에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라면 라면밖에 모르는 사람.


너는 처음 데이트하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고,


너는 그런 사람이어서 좋아했던 거고.


“엄마, 라면 끓여 주는 거에요오~?”


화들짝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아들은 애교를 장착하고 내 무릎에 매달려 있었다. 라면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기세였다.


하. 저렇게 귀엽지만 않았어도.


“그 아빠에 그 아들이야, 정말.“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아마 찬장에 안성탕면이 남아 있을 것이다.

냉장고에는 깍두기가 있을 테고.





안녕하세요, 찬란입니다! 영광스럽게도 @freejazz 작가님께 간택을 받아 ‘라면 단상’ 연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은 회사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일들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다루는 분입니다. 여러 인간 군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독자들을 몰입시키시지요. 글도 술술 읽혀서 짧지 않은 글이 단숨에 읽히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제 다음 연재 타자로는 @김동의 작가님께 이 공을 넘겨드리고자 합니다. 놀라운 기억력으로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내시는 작가님으로, 집을 짓는 과정, 그리고 회사에서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한 땀 한 땀 빚어내시는 장인 작가님이라 칭할 수 있겠네요. 글 곳곳에 묻어있는 진한 위트는 보너스구요. 분명 라면에 대해 멋진 이야기를 들려주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찬란 드림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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