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냉정하게, 태도는 품위있게

프로의 세계에서는 사람도 수단이야

by 찬란


프로의 세계에서는 사람도 수단이야.



영화 ‘미스 슬로운’ 에서,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은 워싱턴의 냉정한 로비스트다. 냉철한 전략가이자 냉소주의자로,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략가다.


그렇게 대형 로펌에서 잘나가던 그녀에게 의뢰가 들어온다. ‘총기 규제‘에 반대하는 거대 단체가 그녀에게 총기 규제법안 철회를 맡긴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그 제안을 거부하고 오히려 총기 규제를 지지하는 소규모 로펌으로 이직해버린다.


그리고 모두가 질 거라고 말하는 싸움을 시작한다.


오로지 단 하나, 자신의 '신념' 때문이다.


미스 슬로운 (제시카 차스테인)
전 제가 믿는 일만 맡아요.
그래야 밤에 발 뻗고 잘 수 있거든요.


비관주의자로 살면 좋은 점이 있다.

기대치가 낮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하기가 쉬워진다.


“뭐 잘 되겠어?”


그렇게 시작한 일이

생각보다 괜찮은 결과를 내고, 좋은 피드백까지 돌아오면

그 자체로 기분이 좋아진다.


게다가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어’ 라는

관계에 대한 비관주의까지 탑재하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괴로움도 선제적으로 줄어든다.

상대에게 바라는 게 없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사랑과 호의에 고맙고 또 행복해진다.


그래서 나는 비관주의자였다. 특히 업무를 맡았을 때는 더욱 그랬다.

시니컬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준비하고 실행했다.

그러자 ‘냉정하지만 일을 잘한다.’는 평이 돌았고,

나는 대기업의 그룹향 보고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비관주의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일 수는 있어도,

나 자신을 바라보는 창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품위’라는 말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겐 존엄성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긍지, 신념, 하한선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겐 그건 대의, 명분, 양심이다.


나에겐 그것이 ‘품위’였다.


마지막 순간이 와도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붙잡아야 할 단 하나의 것.

그것이 나를 아름답게 한다고 믿었다.


흠결 하나 없이 완벽하게 사는 사람보다,

수많은 결함과 흔들림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에

지킬 것을 지켜내는 사람.

지킬 것을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사람.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지만,

동시에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 신념을 추구했던 미스 슬로운.


그녀는 동료에게 “프로의 세상에서는 사람도 수단이야.”라고 말했지만,

감옥에 가는 순간까지 동료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런 사람이 더 인간답다고,

나는 믿는다.


그 믿음은,

내가 직장 내 성추행을 겪었을 때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를 버티게 한 기둥이 되었다.


그의 온갖 회유과 협박 속에서도,

나는 끝까지 내 품위를 지키고 싶었다.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나는 진정으로 아름다워진다고 믿었다.


‘품위’는, 내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아

평소 일렁이는 잔물결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의 몇 번,

거대한 파도가 덮칠 때마다

단단한 땅이 되어 나를 지지해 주었다.


그건 사실 내 밑바닥이었을 수도 있다.

내 밑바닥을 직접 마주하는 경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가면서도

내가 믿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려는 작은 마음.


그렇게 파도가 끝날 때까지

단단하게 버텨 냈을 때,

나는 나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내 품위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지킬 게 하나쯤 있어야 했다.

아무도 안 알아줄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나를 지키니까,

숨이 쉬어지더라.


그리고,

그런 시간들도 결국 다 끝이 난다.

그 때 웃으며 되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그 모습이 기특하고 예쁘다.


비관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품위는 지키려고 노력해보자.








*제 이야기를 담은 연재 브런치북을 읽으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용기 내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연재 브런치북] 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https://brunch.co.kr/brunchbook/chanranfromyou




*<용기에도 기술이 필요해> 연재를 마칩니다.

다음 마지막화는 에필로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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