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하지만 필요한 너, 수면제
“I am not in danger, Skyler. I am the danger.”
난 위험한게 아니야, 내가 ‘위험’인 거지.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한 장면,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에서, 평범했던 화학 선생 월터 화이트가 약에 손을 대고, 이윽고 그 자신이 ‘위험’이 되는 순간이다.
그 한 알의 약은, 어떤 이에게는 희망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길이 된다.
나도 약을 먹었다.
처방받은 항불안제, 항우울제, 수면제.
처음엔 하루를 버티기 위한 도구였고,
어느새 손끝이 먼저 그걸 찾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끝내
위험의 씨앗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은 성공했고, 어떤 날은 실패했다.
그건 월터 화이트가 간 길과는 아주 다른,
나의 조용한 생존기였다.
범죄 피해자가 된 후,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법적 여정도 있었고,
그보다 더 치열한 마음의 여정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처음엔 우울증 약을 복용해야만 했지만,
사건이 마무리되고, 삶이 제자리를 찾아가자
조심스럽게 ‘약을 줄여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약을 줄이다 보면 언젠간 해방될 날이 오겠지.
그 결심은 쉽지 않았지만, 내 마음이 먼저 준비되었기에 가능했다.
정신과 약의 핵심은 수면이었다.
어떤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많은 정신과적 증상은, 나쁜 수면에서 시작됩니다.”
제대로 자지 못하면
다음 날 컨디션, 감정, 판단력…
모든 게 무너진다.
그 무너짐은 다시 또 다른 고통을 불러온다.
나는 사건 초기에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해자가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고,
회사에서 그를 내 유관 부서로 발령을 냈을 때.
수면제를 먹고도 한 시간마다 깼다.
그 시기의 나는
스스로를 지탱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약의 도움이 절실했다.
살아남기 위해
약으로 그것을 보조해야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교수님께 말했다.
“교수님, 단약하고 싶어요.”
단약.
약을 끊는다는 것.
이 말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말 가능할까?
약 없이도 버틸 수 있을까?
내 마음은 조심스러웠지만
어느 날, 분명한 확신이 왔다.
“이제는 괜찮다.”
그동안 나를 잘 지켜준 약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제는
작별을 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
교수님과 상의하며
천천히 약을 줄여나갔다.
매일 먹던 약은
격일로,
주 3회로,
주 1회로…
조금씩 내 손 위에 놓이는 알약이 줄었고,
그날
작은 성취감이
온몸을 따뜻하게 감쌌다.
물론 단약 과정은
늘 순탄하진 않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잠들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땐 이렇게 말해주었다.
지금 이 모습도 나야. 괜찮아, 같이 가자.
완벽한 하루가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맛있는 걸 해 먹고,
아이들과 웃고,
낯선 이의 선의에 고마워하고,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기뻤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기쁨.
내가 해냈구나.
이만큼 아팠고,
이만큼 견뎠고,
죽을 뻔했던 내가
이만큼 살아냈다.
그 기억은 앞으로의 나에게
무너질 수 없는 단단한 기반이 되어주겠지.
삶은 앞으로도
다양한 모습을 하고 나와 걸어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기억이 나를 지킬 거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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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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