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다 별일 아니고, 지나간다는 것
“파인애플 대리, 올해에도 사회 볼 거지?”
“아…네… 어휴 자신 없는데…“
중국어를 한다는 이유 하나로 중국 고객초청행사를 맡았다. 그저 중국 VIP 거래선들을 모시고 호텔에서 술 한 잔 하는 저녁식사였다. 그런데도 일년 내내 준비가 필요했다. 한 번 행사를 치러 내자, 이 일은 자연스레 나의 것이 되어버렸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온갖 일들이 벌어질 수 있으니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한 번이라도 해 본 너가 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
누구도 이 일을 맡고 싶지 않아 했다.
무난하게 행사를 치러내면 성공이고, 뭐 하나라도 빵꾸가 나면 대형 참사가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성공하고 나면 숫자로 보이는 결과값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평타 아니면 쪽박. 당연히 누구도 내켜 하지 않을 일이었다. 동료들은 추켜세워주며 이 일의 적임자는 파인애플 대리뿐이라 띄워주었다.
“이 일은 파인애플 대리 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리고 나는, 칭찬에 매우 약한 사람이었다. 칭찬만 해주면 양잿물도 들이킬 기세였다. 공치사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파인애플은 신이 났다. 이때다 싶었던 팀장은 은근 슬쩍 휘파람을 불며 다가왔다. 기존 행사 담당자가 하지 않았던 일들을 내 어깨에 차곡 차곡 얹기 시작했다.
“파인애플, 요번에는 직원들이 무대에서 댄스를 하면 어떨까?”
“파인애플, 예산 추가하는 품의를 쓰면 어떨까?”
“파인애플, 경품 행사 할 때 큰 룰렛같은 걸 설치하면 어떨까?”
“파인애플, 임원분들 개인별로 일정표좀 분단위로 만들어 보여줄래?”
그리고 끝내는…
“파인애플, 한 번 사회를 봐보면 어떨까? 직원들이 사회를 보면 얼마나 고객들이 좋아하시겠어?”
“제가요? 왜요?”라 반문 하지 못했다. MZ 세대도 아니었고, 칭찬에 목말라 있는 가여운 파인애플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려놓고, 내 식대로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나를 좋게 봐주셨으니 이런 중책을 맡기신 걸거야. 열심히 연습해서 잘 해 보자!”
메론씨는 중국 현지 직원 중 ’타고난 사회자‘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중국에서 행사를 하면 반드시 메론씨가 사회를 본다고 했다. 과일계의 유재석이었던 그는 타고난 순발력과 유머감각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렇게 메론씨와 내가 공동 MC를 보게 되었다. 메론씨가 주도해서 사회를 보면, 나는 영어와 한국어로 통역하기도 하고, 적당히 중국어로 맞장구를 치는 역할이었다.
“레이디스앤 젠틀맨, 플리스 기브어 빅 어플라우스~”
별 건 없었다. 스크립트를 딸딸 외우기만 하면 되니까. 외우는 건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누구라도 할 수 있었다. 입에 김밥을 우겨넣으며 차 안에서, 모니터 앞에서, 지하철 안에서 대본을 외웠다.
광장시장에 가서 한복을 골랐다. 행사가 아니라면 절대 마주칠 일 없을 화려한 나비무늬의 치마를 법인카드로 결제했다. 그 와중 이 치마의 운명을 잠시 걱정했다. 이 아이는 한 번 입히고 나면, 그 다음에는 쓰일 날이 있을까…본인 앞가림도 못하는 파인애플은 그렇게 한 폭의 치마까지 걱정했다.
사회자 대본을 검토하고, 사장님의 환영사를 작성하고, 임원들의 스케줄을 검토하고, 직원들의 공연을 감독했다. VIP 선물을 고르고, 초청고객리스트를 받아 테이블에 배치하고, 무대 디자인을 골랐다. 이 모든 것들은 품의를 올려 팀장과 임원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어떨까‘ 팀장은 매번 자신의 아이디어를 추가했다. 말만 하면 다 이뤄지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행사 이틀 전, 사고는 일어났다.
본부실로 쓰던 스위트룸에 실무진들이 모였다. 하나하나 준비상황을 체크하고 모두가 알아야 하는 내용을 공유하고 있었다. 임원들의 스케줄을 체크하고 있었는데, 노트북에 메신저 소리가 띵동 울렸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수박 상무의 비서였다.
“파인애플 대리님, 혹시 수박 상무님 비행기표가 예약이 안되어 있나요?”
나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메론씨와 따로 만나 사회자 대본 리딩을 하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뭐? 임원의 비행기표 예약이 안되어 있다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비서님께서 수박 상무님 비행기표 예약을 안하셨나요?”
“앗…저는 파인애플 대리님이 일괄적으로 임원분들 표를 예약하신 줄 알았는데요…”
”네??“
쿵.
삐용삐용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소리)
행사 이틀 전인데 5번 테이블에서 거래선을 만나야 할 수박 상무가 불참하게 생겼다. 이런 불상사가. 이런 말도 안되는 실수 때문에. 모니터를 바라보는 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비행기표 예약은 비서분들께서 하시는 건데요. 일단, 지금 예약이 안되어 있으시단 거죠? 제가 여행사 담당자랑 지금 표를 구할 수 있을지 문의해볼게요.”
“앗..죄송해요. 네 부탁드릴게요.”
내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누구의 잘잘못을 가릴 때가 아니다. 일분 일초가 급했다. 임직원들의 비행기표를 예약 대행해 주는 담당자의 연락처를 급히 찾았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두 손이 떨렸다.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지금 너무 비상상황이에요. 내일 이 KE177 10시 항공편 티켓 지금 구할 수 있을까요?”
“엇 이틀 전이라 구해질지 모르겠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천년 같은 이십분이 지났다. 비행기표 담당자와 나의 전화통화 내용을 들은 주변 실무진들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대로라면 대형사고다. 임원의 비행기표가 누락되다니. 그것도 까다롭기로 소문난 수박상무가. 어떻게 된 거래? 몰라 비서가 그랬는지 파인애플 대리가 놓쳤는지. 다시 내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나는 파드득 전화를 받았다.
“파인애플 대리님, 표가 있긴 한데… 비즈니스 석이 아니라 이코노미 석 뿐이에요. 수박상무님께서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아……그렇군요. 일단은 그 표라도 먼저 확보 부탁드려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쉬어 나왔다. 전화를 끊고 헛기침을 연달아 했다. 비서에게 이 중간 단계 나쁜 소식을 전할 차례였다.
”비서님, 표를 구했는데 이코노미 석이에요. 수박상무님께 그렇게 양해 부탁드려야 할 것 같네요.“
”아 그렇군요. 제가 가서 상무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네네, 돌아오시는 편은 비즈니스로 확보할 겁니다. 잘 좀 말씀 부탁드려요.“
전화를 끊었다. 사람들이 귀를 쫑긋하고 내 통화를 듣고 있었다. 어쨌든 이코노미라도 구했으니 다행이지요, 후배 한 명이 나를 위로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시 후 수박 상무의 비서로부터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파인애플 대리님, 수박 상무님이 괜찮다고 하셔요. 표를 구해서 참 다행이에요!“
해맑은 그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기운이 빠졌다. 멍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여전히 한복을 입은 채였다. 그제서야 내 눈치를 보며 사회자 대본 리딩을 기다리고 있던 메론씨가 눈에 들어왔다. 메론씨에게 쉰 목소리로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간신히 말했다. 본부 안에 있던 스위트룸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리곤 지금 한복을 입고 있어 변기에 주저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면대 옆에 주저 앉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덮쳤고 나는 끄윽끄윽 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게 입을 막아야 했다.
“파인애플 대리, 정말 수고 많았네.”
행사가 끝났다. 중국 고객들을 마중하는 것도 마무리 되자 우리는 서로에게 고생했다며 인사했다. 5번 테이블에 호스트로 앉아 있던 수박 상무가 고객들을 배웅 한 후 나에게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세상 죄송한 표정으로 인사하자 수박상무는 다짜고짜 내 옆에 섰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한복 입고 무대에서 사회 보는 모습을 보니 아주 멋지더라고. 행사 기획하고 준비하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어.”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 주었다. 수박 상무에게 비행기표 얘기를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그는 휙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내가 수박 상무와 사진을 찍는 모습을 지켜본 다른 이들도 다가왔다. 그들도 자신과도 사진을 찍자고 부탁했다. 잠깐이었지만 셀럽이 된 듯했다. 한복의 힘은 참으로 위대했다.
“파인애플 대리님, 수박 상무님이 파인애플 대리님이 사회 봤다고, 대단했다고 엄지척 하시던데요?”
한국으로 돌아와 만난 수박 상무의 비서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인사했다. 그녀의 미소를 마주하자 나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머쓱했다. 나를 뺀 모두가 여유가 있었다. 초긴장 상태로 온 신경이 곤두서 있던 나에게, 세상은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별 일 아니었는데 나는 그렇게 울고 불고, 성질 내고, 파르르르 했던 것이었다.
“비서님,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수박 상무님께도 감사하네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 사건은 나의 신경안정제 같았다. 이후에도 내가 지나치게 과민해지거나 전투태세가 되면, 그 사건을 떠올렸다. 다 별 일 아니고, 지나가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여유를 가져도 괜찮다고. 한복 입고 주저앉아 울었던 그 때를 떠올려보라고. 웃기지 않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지나고 나면 심각한 일은 아무것도 없더라.“
그랬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문제는 끝난다.
결국엔 해피엔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