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이 되지 않아 투약한 면역글로불린의 위력은 대단했다.
아이 또래 아이들은 모두 첫돌을 지나며 거친 돌치레를 겪으며 주변의 엄마들은 열과의 전쟁을 하고 아이들은 한 뼘씩 부쩍 커진 모습들을 보였다.
우리 아이도 돌이 지났는데, 열은커녕 너무 그 어떤 돌치레의 반응이 없어 안도의 한숨을 쉬던 어느 날.
유난히 늦게 뒤집고, 기고, 서던 아이는 자신의 첫 생일이 지나고 3개월이 되어서야 갑자기 걷기 시작했다.
아이가 걷는다는 기쁨도 잠시.
아이는 갑자기 이래도 될 만큼 동시다발적으로 잔병치레를 시작했다.
면역글로불린을 투약하고 일 년이 되어 그런 걸까. 갑자기 감기와 장염이 찾아오고 아이는 수척해져 갔다.
수척해진 아이는 자꾸만 놀지 못하고 거실에서 누워있다가 잠들기 일 수였고
열은 일주일째 잡히지 않고 매일 같이 소아과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아이의 감기는 시간이 지나며 폐에 염증을 일으키고 아이는 생애 두 번째 입원을 폐렴으로 하게 되었다.
주사기가 아파 밤새 울고, 입맛이 없어 환자식을 하나도 먹지 않고 자기만 하는 아이를 보며
내 마음이 다 도려내져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가 대신 아플게 넌 아프지 말고 건강만 해달라는 말이 이럴 때 이렇게 쓰는 말임을 체감했다.
그땐 몰랐다. 폐렴으로 입원한 이 입원이. 우리의 수없는 폐렴과의 전쟁의 서막일 줄은...
그 후로 아이는 매년 2회 폐렴으로 입원을 하고 한 달에 5일 빼고 매일 소아과에 출석을 했다.
아무도 마스크를 끼고 다니지 않던 그때, 우리 아이는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는 면마스크를 매일, 한여름만 밖에서만 빼고 매일 끼고 다녔다.
어느 날은 남편과 백화점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뛰어서 1분도 걸리지 않는다 계산하여 아이의 마스크를 씌우지 않고 아이를 안고 뛰었는데 그날 밤, 아이는 콧물과 함께 열이 났다.
또 어느 겨울날은 아이에게 도톰하고 따뜻한 우주복을 입고 온 집안의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는데 그다음 날 아침 기침을 하며 열이 나 또 소아과에 갔다. 오죽하면 의사 선생님은 "너 이건 너무 한 거야"라고 아이에게 장난 섞인 일침을 놓으실 정도였으니...
그러던 아이의 잔병이 줄어든 건 본격적인 코로나로 아이들이 등원도 등교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내 아들은 새 기관의 입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팬데믹 시대가 도래했으니 입학도 등원도 못하고 집에서의 가정보육이 진행되는 나날이 길어졌다. 주변 아기 엄마들은 삼시세끼 먹이는 어려움과 온종일 아이와 집에서 지내야 하는 고단함에 지쳐가고 있었다. 나 역시 혼자 있어야 에너지가 충전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아이가 밖에 나가지 않고 나와 지내니 덜 아팠다. 가끔이라도 나가야 할 땐 세상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나만 마스크를 쓰고 나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마스크 착용도 더 쉬워졌다. 그렇게 2년을 지내고 나니 아이는 그새에 한 번의 폐렴 입원을 제하면 그전과는 다르게 건강해져 있었다.
매년 2회 이상의 폐렴 입원과 잦은 병원 방문을 통해 내 소원은 늘 아이가 건강한 것.
아이가 아프지 않은 것 그것이었다. 누군가 물어보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아이가 아픈 일이었다.
아이가 아프면 내 세상의 모든 게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모두가 일상을 그대로 살아가는 중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은 그 상태 그대로에 머물러 오직 아이만 보였다. 아이가 내는 기침소리, 아이의 등에서 들여오는 꾸르륵 거리는 폐소리, 아이가 먹는 음식, 아이의 잠자리, 아이의 얼굴.... 그저 아이만 보였다.
아이가 퇴원하는 날만 기다리고 아이가 퇴원하면 내가 앓아누웠다.
아이가 4학년인 만 10살이 된 지금도 나는 아이가 아프면 세상이 멈춘다.
이전처럼 입원할 만큼의 폐렴이 걸리지도 않고 아이가 아프면 큰일 날만큼 마음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열이라도 나면 내 세상에는 오직 이 아이 하나만 남아있고 내가 살던 세상은 모든 것이 일시정지 상태가 된다. 어떤 이는 내게 유난스럽다고 하지만 이게 그동안 내가 아이를 지켜왔던 방식이고 아이가 내 품을 떠나기 전까진 내 세상은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을 테니 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