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키우며 점점 나의 세상은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아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엔 외출도 마다하고 집에서 아이를 재우고, 날이 좋으면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언덕길을 내려갔다. 가방에는 늘 아이 먹일 간식과 기저귀가 그득그득 들어있었다.
조리원 동기나 비슷하게 아이를 낳은 지인들은 벌써부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다고 했다.
나도 혼자 있고 싶은 맘이야 굴뚝같지만 자주 아픈 아이를 기관에 일찍 보내고 마음이 편할 자신이 없어,
이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시기를 엄마 눈에 꽉꽉 눌러 담고 싶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아이를 옆에 끼고 지냈다. 그렇게 살부비며 딱 붙어 있던 시절들을 지내고 4살에 되던 봄날 아이는 예쁘게 머리칼을 다듬고 기관에 입학했다. 아이는 첫날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놀잇감에 엄마를 잊은 듯 3시간을 꽉 채워 놀다 나왔다. 그 잠시의 시간 동안 집에 와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고 청소를 하던 나는 한 시간이 지나기가 무섭게 아이가 보고 싶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2시간이 채 되지 않아 아이가 보고 싶었다. 얼른 기관으로 달려가 아이를 안아 집으로 오고 싶던 날들이었다. 아이가 집에 없어 몸이 편한데 신경은 온통 아이가 있는 곳으로 향해 있었다.
기관에 들어가서 한 달가량 아이는 재미있게 엄마도 찾지 않고 잘 놀았다. 분리불안이 있는 건 아이가 아닌 엄마인 나였다. 자그마치 3년을 24시간 꽉꽉 눌러 아이와 떨어진 적이 없었다. 잘 때도 아이를 품고 잤고 모든 순간을 아이와 붙어있던 시간들이었는데 갑자기 아이가 없는 공백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마음이 허전했다. 아이만 기다리는 날들이었다.
한 달 즈음이 흘렀을까, 이제 아이가 없는 시간에 익숙해져 나도 나의 시간을 찾고자 했던 게 욕심이었을까.
집에서 40분쯤 떨어진 곳에서 오랜만에 벼루던 일을 보고 점심을 먹으려 식당에 들어간 찰나
생경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고 혹시나 싶어 받은 전화기 너머 목소리에선
엉엉 울어대는 우리 아이의 목소리와 다급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정신없이 섞여 어서 와주셔야 한다는 말만이 반복되게 들렸다. 마침 그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던 남편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어 지금 달려가는 중이니 아이를 먼저 하원시켜 집에 있어달라 부탁을 했다.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오니 이제야 문득 엄마의 부재가 느껴져 기관에 더 이상은 가기 싫어진 아이가 눈물 자국으로 얼굴이 꼬질꼬질해진 얼굴로 엄마 하며 내 품을 파고들었다.
그날 이후 나의 분리불안은 끝났지만 아이의 분리불안과 등원전쟁이 시작이 되었다.
아이는 기관을 가기 전 집에서부터 안갈래를 외쳤고 기관 앞에서는 통곡을 하여 단호하게 떠나오는 엄마역을 하며 선생님꼐 우는 아이를 보내고 아이가 안 보이는 기관 문옆 쪽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사그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겨우겨우 적응을 시켰다.
여느 때처럼 아이를 등원시키려는데 아이의 손에 처음 보는 무언가가 보였다. 발에도 비슷한 것이 보였다.
한창 출근 준비 중이던 위층에 사는 내 동생(유치원교사)을 불러다 아이의 손과 발에 난 것을 보여줬다.
"언니, 이거 수족구 같은데"
부리나케 달려간 병원에선 수족구 판정을 받고 아이는 일주일 동안 기관 등원을 못하고 집에서 격리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겨우 시킨 적응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게 시작이었을까.
아이는 두 달 등원하고 이주 집 또는 병원에 입원하여 요양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적응을 할만하면 못 가고, 또다시 적응을 하면 못 갔다.
매일이 전쟁이고 매일 이게 맞나라는 생각을 하던 첫 기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