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기관에서 아이를 졸업까지 시키고 싶은 것은 그저 내가 꿀 수 있는 한낮의 꿈같은 거였다.
무리 없이 그저 쑥쑥 잘 자라는 듯한 아이의 마음에 작은 옹이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영아기 시절부터 같이 붙어 다니던 여자친구가 아이의 기관으로 옮겨와 같이 다니면서 아이에게 또래관계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아이보다 발달이 빠른 그 아이는 아이에게 자기만 기다리게 하고, 자기와만 놀게 하여 아이는 그 아이와 놀이하는 시간을 빼고는 늘 혼자였다. 같은 반 남자아이들도 아이를 이미 그 아이와만 노는 아이로 낙인찍어 아이를 껴주지 않았다. 5살 아이들에게도 이미 냉정한 사회생활이 존재했다.
아이의 마음이 다치는 줄도 모르고 그 아이의 엄마와 언니, 동생 하며 하물며 주말에는 가족들끼리 모임도 갖으며 지냈다. 2학기 상담에서 담임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의 모든 상황을 알게 된 후 멍청한 엄마인 내게 화가 나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동안 혼자 외로워하며 있었을 아이를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그 아이의 엄마와 4년을 붙어 다녔는데 결국,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고 아이들을 좀 떨어뜨려야겠다는 말을 하자 나는 그 아이의 엄마가 쌓아 올린 세월이 무색하게 철저히 서로 남이 되어버렸다. 선생님도 인정하는 상황을 그 아이 엄마만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사람을 잃었다. 허나 내 아이는 지켰다.
그런 일이 있음에도 원을 옮길 마음은 없어 아이를 원에서 극복해 보기를 바랐으나, 담임 선생님 또한 내가 믿을 만큼의 역량이 되지 않으셨다. 이미 그 아이랑만 노는 걸로 낙인이 찍어있는 아이를 두고 모든 아이들이 보란 듯이 오늘 남자아이는 우리 아이랑만 놀라며 이야기를 하니 아이들은 더욱이 우리 아이를 옆에 두고 자기들끼리만 놀았다. 아이가 집에 와 다른 남자친구들이 블록놀이를 할 때에 그저 옆에 앉아만 있던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다시금 억장이 무너지며 기관을 옮김이 맞다고 여겨졌다.
이미 옮기려면 옮기고 거취가 정해져 있어야 할 시기에 원을 옮기려고 마음먹으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일어난단 듯이 갑자기 유치원에서 어린이집으로 자리를 옮긴 동생이 떠올라 그 원으로 아이를 밀어 넣었다. 아이에겐 절대 이모라는 말은 하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를 것을 약속을 하고.
그렇게 원을 옮기고 새로운 기관의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우리 아이가 3월부터 원을 갈 수 없게 되는 일이 생겨버렸다.
'엄마 언제 가요?'라는 아이의 질문에 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난들, 이 역병이 언제 가실 줄 알겠니..
아이와 산책을 다니며 보는 기관 앞에서 아이는 재차 질문을 하고, 그저 나는 곧, 곧, 가자라는 말뿐이 할 수가 없었다. 두 달 즈음이 흘러 아이들이 한 명, 어쩌다간 두 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관에 살짝 보내보니 새로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적응을 잘해나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른 만큼 아이가 그만큼 자랐있었다
이모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기 때문일까, 아이는 치밀하게도 새 기관을 2년 동안 다니며 졸업하는 그날까지 아무도 아이와 내 동생의 관계를 의심도 할 수 없게 단 한 번도 이모라 부르지 않았다. 집에 와서는 둘이 그렇게 장난치며 놀면서도..
새로운 환경과, 이모가 있다는 안심과, 또 좋은 선생님들을 만난 덕택일까 혼자 있던 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고 남자아이들의 놀이에도 무리 없이 끼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 아이 자체가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것 또한 덕분에 제대로 알면서 아이에게 사회성을 넓히는 기회를 계속 주려고 모두가 함께 애를 썼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함께 하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이가 사회에 일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선 가정 내에서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일으켜 세워줘야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