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azy Cow Society
Oct 24. 2021
증오는 나의 힘
나는 왜 너를 싫어하는가 (10)에필로그2
짧지도 길지도 않은 어중간한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소화가 안되는 감정들이 나를 덮쳐올 때마다 근원을 찾아가보면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벌어진 상황에 따라 내 감정에만 충실했다. 다음에는 미워하는 사람을 이해해보려 노력해보려 안간힘을 썼다. 정말 궁금했다. 왜 저 사람은 저런 행동을 할까? 한 사람이 특정한 선택을 내리기까지 살아온 시간에 의해 축적된 습관이 영향을 미치므로, 그 뿌리를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그렇게 관찰을 하다 보니 억단위의 인구 수에 비하여 성향은 셀 수 있을 정도로 분류가 된다는 걸 경험상 깨달았다. 나는 김용의 [사조영웅전] 중 ‘주백통’을 보며 가수 김건모가 떠올랐던 일이 지금도 신기하다.
지금까지의 글들은 내 오랜 상처를 풀어냈다는 자체에 후련하면서도, 쓰면 쓸수록 참 자만스럽구나 싶다. 심리학 공부도 하지 않고, 더없이 이기적인 사람이 완전히 주관적인 의견을 늘어놓으면서 정답 마냥 단정짓는 태도가 괜찮은지 생각했다. 더 나은 글솜씨가 있었다면 미묘한 차이를 잘 풀어낼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나야말로 나의 행동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일까봐 가장 두려웠다. 영화 마케팅을 하던 시절 누군가를 현혹시키기 위하여 글과 말을 너무 많이 남발하며 괴로웠던 기억 때문이다. 이것은 정직한 일인가? 매일 생각했었다. 회사에서 커지는 책임만큼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 안다는 듯 장담하고 나와 상대를 속이는 빈도가 잦아졌고 죄책감은 그칠줄 몰랐다.
남 험담만 늘어놓는 사람 옆에는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법이다. 부정적인 기운을 소화시키는 일은 꽤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하니까. 한 때는 누군가를 계속 미워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못 견뎠다. 그런데 나를 싫어하는 나조차 싫어하게 되면서 미움의 굴레 안에서 빠져나오기가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완전무결하지 않은 자신을 바라는 것 자체가 오만인 것 같았고, 설사 인간적 결점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화가 나는 부분은 언제나 부조리와 정의에 관한 것이었기에 어찌됐든 내 화의 근원이 더 나은 무언가를 원하는 갈망이라면, 건강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어쩌면 나의 원동력은 ‘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김수영 시인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가’ 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이 시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만원 지하철에서 커다란 백팩을 내려놓지 않는 행인이나 공공 화장실의 입구 문을 열어놓고 가는 누군가, 카페에서 주문할 때 미리 재료가 떨어진 메뉴를 알려주지 않는 직원 등을 신랄하게 욕할 때마다 나를 쿡쿡 찔러 댔다. 이 시의 영향이라고까지 말하긴 거창하지만 나만의 불매운동을 지속한지 2년차다.
한동안 내가 돈을 지불하고 구매하는 제품의 회사들의 행보가 눈에 띄던 시기가 있었다. 사고 또 사는 소비의 굴레에서 평생 객체로 살고 싶지 않아졌던 것이 첫 계기였다. 그러고 나니 예전엔 눈감고 지나갔던 기업들의 납득할 수 없는 선택들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집단의 부정적 영향력은 주변에 ‘있잖아 걔 이상한 누구’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전범회사부터 갑질 회사, 비리 회사 등 다양한 사유로 구매를 끊은 브랜드들이 200여개 정도 된다. 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의지 표현 도구라 생각했다. 우리의 작은 선택들은 시장의 구조를 결정하는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임을 지고 있으므로 얼마를 쓰든 사회에 지속적으로 아젠다를 던질 수 있는 주체가 되어 보기로 결심했다.
나의 넘치는 화는 이렇게 풍력, 수력, 태양열 에너지처럼 잘 변환하여 나를 건강하게 굴리는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사람을 향한 분노의 빈도는 여전히 잦지만 마음 속 평화를 찾는 방법을 나름 찾을 수 있었다.(‘복수하지 말고 강가에 앉아 기다리면 원수의 시체가 떠내려온다’는 외국 속담을 좋아한다.) 미워하는 사람들과 닮지 않으려 부단히 스스로를 돌아보았으니, 그들이 나를 가르친 셈이다. 나를 미치도록 화나게 했던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데드라인이 없으면 일을 끝내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시작하게 만들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덕분에 하나의 이야기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