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azy Cow Society
Oct 16. 2021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내로남불은 사실상 근현대가 만든 신사자성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단어가 아닐까? 다시 말해 나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사람들이다. 이 두줄만으로도 이미 당신도 누군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앞서 쓴 유형1 ‘공감무능력자’를 기반으로 탄생한, 일상에서 가장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빌런들이라 할 수 있다.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선호하는 나에겐 대학 동기로 만나 햇수로 15년을 알고지낸 친구 두 명이 있다. 주변에 착하진 않지만 상식적인 아이들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우리 셋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예민해서 오늘 하루 싫었던 것만으로도 팔만 대장경을 쓸 수 있을 정도인데, 이런 성격들이 나름 오래도록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모토가 모두 ‘내가 싫은 것은 남한테도 하지 말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나는 싫어도 남한테는 괜찮다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이어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평소 일할 때도 목적이나 의미가 명확하지 않고 납득이 안되면 몰입을 못하는 편이라, 행동 논리의 기준이 상황, 편의에 따라 바뀌어 일관성이 없는 내로남불 유형을 보면 유난히 가슴 깊이 돌덩어리가 내려 앉는 답답함을 느낀다.
한가지 떠오르는 사례가 있다. 사내 여름 복장 규정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있었다. 여자들은 반바지까지는 아니지만 적당한 길이의 치마와 샌들까지는 허용이 되는 분위기라 나은 편인데, 남자들은 여름에도 긴 바지에 발가락이 보이지 않는 신발을 착용해야 하니 답답할 것 같다는 의견을 말하는 중이었다. 나와 함께 맨발가락을 드러낸 캐주얼 샌들을 신고 있었던 상대방의 당황스러운 답이 이어졌다. “남자들은 반바지나 샌들 솔직히 허용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남자들 다리에 털 보이는 거 진짜 흉하잖아”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비슷한 패턴의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납득할 수 있는 언행은 아니었지만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소소한 모순 정도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넘어갔다. 나 역시 내 흠을 못 보고 넘어가는 순간들이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경향이 개인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느꼈는데, 다들 지나치게 화가 나 있어 본인도 지키지 못하는 잣대를 들이대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비난하는 집요함이 불편해진지가 꽤 오래 되었다. 세대갈등, 남녀갈등, 빈부격차갈등 등 모든 문제는 이원화되어 편이 갈린다. 이 와중에 상대편에 내세운 기준으로부터 오로지 자신에게만 끝없는 관대함을 요구하는 것만 같았다.
그 중에서도 여성으로서 페미니즘을 비롯한 남녀갈등 문제가 가장 크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익숙했던 것들도 변한 시대적 가치를 기준으로 문제가 있다고 인지되었다면, 그것은 성별과 상관없이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이 당연하다. 여성, 남성, 또 다른 성, 젠더를 떠나 우리는 모두 사람이고, 사람은 평등하다. 내가 싫다면, 상대도 싫다. 이 기본 전제부터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지금은 일관성 없는 판단 기준의 문제를 넘어, 그저 상대가 이익을 얻는 것이 마치 나의 손해처럼 여겨져, 이를 막기 위해 나는 괜찮아도 너는 안된다는 식의 무조건적 반대를 외치는 편가르기 싸움으로 변질되어 버린 꼴이다. 유아기에 동생이 태어나거나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만났을 때 부모는 물론 장난감까지 자신의 소유를 빼앗긴다는 불안함에 자신의 몫을 절대 나누지 않으려 하고 어린 동생에게 해코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한다. 학창시절 교복을 바꿀 때 막상 새 교복을 입을 신입생은 투표권이 없고,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시안을 선택하게 되는데 대부분 ‘내가 이렇게 못생긴 교복을 입고 다녔는데, 신입생들만 예쁜 교복을 입게 할 순 없지. 너네도 당해봐라’하며 후보군 중 가장 이상한 시안을 선택하던 것을 지켜봤던 경험이 떠오른다.
내로남불의 아이콘과도 같은 영화 <클로저>를 보면, 이 마음은 순수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자기애와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근원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주드 로가 연기한 ‘댄’을 보면 자신을 향한 연민으로 유달리 스스로에게 관대하나, 이 연민이 상대에게까지 갈 턱이 없다. 그러므로 그의 모순된 행동은 자신에게만 허용된다.
대학 전필강의로 '저널리즘' 수업 중 교수님이 ' 강자와 약자에게 5:5의 발언권을 주는 것은 평등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남자와 여자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모두 다름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다. 다름을 기준으로 한 평등은 동일한 수와 동일한 외향, 동일한 조건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본 조건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차별의 행위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지키고자 하는 평등의 기준은 ‘일관된 상식적 행동’이다. 상대의 나이, 직업, 성별, 성격 등 무엇도 상관없다. 각자의 차이는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 된다. 집 앞 편의점에서 계산할 때 카드를 던지지 않듯, 그저 누구나 공통적으로 싫어할 언행은 하지 말자는 것. 내가 나에 대해 끔찍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상대도 중요한 사람임을 잊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