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시장은 개봉관 규모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가장 단순한데, 먼저 독립예술영화는 단관에서 시작해 약 30개관정도의 적은 개봉규모가 특징이다. 상업영화 시장은 기본 500개 이상부터 1천개, 많으면 3천개까지 개봉관을 확보하며 대중 인지도가 매우 높다. 그리고 이 양극 사이에 중립국처럼 다양성 영화 시장이 있다. 이는 약 100~200개관 규모를 말하며, 독립예술영화에 비해 감독이나 배우의 인지도가 높거나, 아카데미 수상작이거나, 대중적인 스토리텔링으로 확장성이 높은 작품들이 많다. 반대로 상업영화와 비교하면 불특정 다수가 모두 좋아할 수 있는 대중적 이야기는 아니지만 확실한 팬덤은 확보할 수 있는 작품들과 주로 직배사(소니, 유니버셜, 디즈니, 워너브라더스) 기준 덜 중요한 라인업들이 이곳으로 향한다. 최근엔 독립예술영화까지 아우르며 말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또한 해외영화의 비중이 더 높은 표현이라고 이해하면 좋다.
영화 시장의 분류에 대해 구구절절 읊은 이유는 앞으로 자본력으로 인한 간극 사이에서 독립예술영화사의 눈물겨운 인지부조화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독립예술영화 시장에 한해서 단언할 수 있는 단 한가지는 이 업계 종사자들은 99%의 확률로 영화를 사랑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50%의 확률로 마이너한 취향을 자랑한다. 1만명을 넘기기도 어려운, 쉽게 웃고 울 수 있는 상업영화보다 지루하고 어려운 영화들이 왜 그렇게 좋으냐 묻는다면 거창한 답일수도 있겠다. 누가 만들었든 비슷비슷한 패턴, 대규모 자본이 투여된 소수의 작품과 사람들에게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100편의 영화에 100개의 이야기가 가능한 세상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더 다양한 창작물들이 탄생할 수 있는 건강한 시장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나름의 책임감까지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업계에 몸담은 이들은 대부분 진심으로 작은 영화를 사랑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 시간을 다 내어 개봉을 준비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한 것은 영화이지, 작은 시장과 예산의 한계까지는 아니었다. “모르고 왔어? 워라밸, 연봉 따지려면 여기서 일하면 안 되지”를 쉽게 뱉는 이 환경에서 속된 말로 ‘현타’가 오는 순간이 있다. 고생한 만큼 많은 사람들이 결과물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 그러나 작은 시장 안에서 작은 영화가 낼 수 있는 숫자는 너무나 미미했다. 그 숫자보다 가혹했던 건 이 업계를 이끄는 리더들이었다. 개봉관, 관객수가 적은 영화를 담당한다고 실력도 하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한 회사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그들은 누구보다 영화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독립예술영화 시장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 역시 우리와 비할 바가 못됐다. 그들에겐 생존의 문제였기에 더 절박했다. 그래서 새삼스럽지만 모든 회사의 목적은 수익 창출이어야 한다. 뒤따라오는 가치가 다를 뿐이다. 우습게도 당시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은 “돈 벌려고 일해”였다. 역으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요즘 애들은 계산적이야. 뭐만 하면 돈을 더 줘야 한대. 돈을 안 줘도 그 이상 해줘야 성공하지. 안 그래?”였다. 나는 그제야 상업영화 시장의 논리가 차라리 부러웠다. 계약, 거래, 관객수, 매출과 같은 숫자의 단순함 말이다.
우리는 신념이 행동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인과관계는 그 반대라는 사실을 인지 부조화 이론은 시사한다. 사회의 압력이 행동을 일으키고 행동을 정당화, 합리화하기 위해 의식과 감정을 적응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점차 다양성 영화는 돈이 최우선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한 것처럼 행동했다. 처음부터 부 대신 명예를 택한 사람이 되었다. 분야 특성상 사회 문제를 고발하거나 진보적 메시지가 담긴 작품들의 개봉이 잦았는데, “이런 좋은 영화들을 소개하면서 돈을 벌 수 있어 얼마나 좋은가”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나 역시 동의했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 문제의 불평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가도 야근수당도 없이 매일 12시 넘어서 퇴근한 직원이 아침에 3분 정도 늦게 되면 대기업을 안 다녀봐서 체계도 없냐며 지적했고(정작 대기업에 가보니 아무 말 안 하더라),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반 여직원들에게 매일같이 결혼해서 아이는 꼭 낳아야 하고, 그렇더라도 일을 그만두면 안된다고 했다가도 채용면접에서 임신 예정을 물었으며, 독립영화 출신으로서 자부심을 갖는다면서 개봉검토를 요청하는 인지도 낮은 한국영화 제작사의 연락은 무시했다. 그럼에도 정치적, 문화적, 도덕적으로 올바른 나 자신에 취해 있는 사람들을 보니 차라리 돈 벌기 위해 영화 한다는 사람들이 더 순수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90%의 확률로 ‘난 중도보수’라고 말한다.
다들 이상향과 현실의 괴리가 커지면서 인지부조화를 겪은 모양새였다. 처음엔 정말로 다양성 영화가 좋아서, 시장을 잘 개척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 자체가 가진 한계는 분명했다. 아트버스터의 조짐이 보이는 영화는 농담 반 진담 반, 회사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각오 정도는 해야 겨우 구매할 수 있었다. 해마다 마켓에서 기본값은 말도 안 되게 치솟았다. 가장 싼 영화도 고작 1~2년 전의 아트버스터 급의 값이다. 그러니 BEP는 자연스레 오르고, 부가 비용은 최대한 줄여야 한다. 대표적으로 인건비, 마케팅 비용이다. 물량공세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는 다양성 영화는 성공하기 쉽지 않다. 이렇게 여러 번의 실패를 겪고 나면, 기대에 차서 업계에 발을 딛었던 우리들처럼 리더들 역시 ‘현타’가 왔을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모습과 실제의 모습이 일치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점점 어려워졌다. 창작물과 창작자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몇 년간 문화예술 분야의 연 이은 미투 사건을 보면서, 어째서 말과 행동이 같기란 이리도 어려운건지 생각했다. 그들도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영화로 만든 다음, 지독한 자기 세뇌를 통해 그것이 자신이라고 믿고 있었던 걸까? 자격지심을 다룬 지난 글의 마지막을 되풀이 하고싶다. 원치 않는 자신의 모습이라도 뒤틀리지 말고 받아들이자고. “우리 사람은 되기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