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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하이커 Jul 30. 2023

일일 일봉우리를 올랐다는 루마니아의 슈퍼 하이커 청년

크로아티아 - 스플리트와 보삭 하이킹

아무런 계획 없이 여름휴가를 덜컥 신청해 버렸다. 8월은 모든 것이 비싸고 어느 곳이나 혼잡할 뿐 아니라 무덥기 때문에 여행은 생각지도 않는 달이다. 이번 휴가 계획을 잡을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그래서 어디론가 빨리 떠나버리고 싶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무모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휴가는 겨우 일주일 전에 결정해 버려서 급하게 준비를 해야 했다. 모든 사람들이 바다에 모여 있는 틈을 타서 산에 오르는 것만이 휴가를 휴가처럼 보낼 수 있는 방법일 듯했다. 이 시기엔 서쪽보다는 동쪽으로 가는 게 좋을 듯했다. 그렇게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사이에 두고 동전을 던졌다. 슬로베니아가 나와서 다시 동전을 던졌고 그렇게 운명의 목적지는 크로아티아로 정해졌다. 동쪽으로 향한다고 해도 이 시기의 크로아티아는 여행하기 저렴한 곳은 아니었다. 예산을 미리 정하고 이번 여행을 7박 8일로 짧게 잡기로 했다.


여행 기간이 너무 짧아서 스플리트(Split)와 두브로브니크(Dubrovnik) 두 곳만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스플리트에서 하루 안에 다녀올 만한 하이킹 코스를 찾아보던 중 비오코보(Biokovo)산맥의 보삭(Vosac)이라는 산이 눈에 들어왔다. 1422m라면 하루동안 완료할 수 있는 하이킹 코스로 적당해 보였다. 그다음에는 사람들이 많이 없는 섬을 찾아 해수욕을 좀 즐길까 한다.




베를린 공항에서 EasyJet 항공을 타고 두 시간 걸려 Split에 도착하니 오후 2시 30분이었다. 공항에서 나와 스플리트 도심으로 향하는 Pleso버스를 타고 AirB&B로 예약한 호스트 집에 들어갔다. AirB&B는 항상 슈퍼호스트 내에서만 검색을 하는 편이라 내가 선택한 숙소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엔 AirB&B의 어떤 숙소에서도 슈퍼호스트의 값어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오늘 아침까지도 사용했을 법한 어느 청년의 방을 3일간 사용하게 됐는데 정말 잠자는 것 이외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앱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슈퍼호스트 청년은 집에 없었고 그의 아버지가 내게 방을 안내해 주었다. 슈퍼호스트 청년은 분명 내가 머무르는 기간 동안 친구집에서 지낼터였다. 그의 아버지와 구사할 수 있는 공통 언어가 없었기에 나는 슈퍼호스트 청년에게 채팅으로 요구사항을 전달했고 그 요청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려 그의 아버지에게 전달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나에게 정보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렇게 좁은 슈퍼호스트 청년의 방에서 3일간을 지내기로 했다.


그 집에 들어서서 처음 한 일은 수영복으로 갈아입는 것이었다. 숙소 집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지도에 Bacvice라고 표기된 해변이 있었기에 큰 비치타월 하나만 들고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어차피 곧 해가 질 저녁이었기에 다른 것을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해변은 생각만큼이나 붐비고 있었다. Bacvice라는 해변은 해변 자체로도 물색깔로도 아름다운 해변이라고 부르기는 힘든 곳이었다. 적당히 기온이 떨어졌을 무렵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기 위해 시내로 향했다.


저녁을 먹을 레스토랑은 벌써 며칠 전부터 검색을 해 두었기에 호객꾼들의 유혹을 물리쳐가며 거침없이 Riva 거리를 지나쳐 Konoba Atlantida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아 불안한 마음이었다. 이런 붐비는 시즌에 혼자 찾아가서 테이블을 요구했을 때 과연 자리를 내어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여행자들의 평가가 맞다면 이곳에선 나를 위해 기꺼이 자리를 만들어 줄 것 같았다. 내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레스토랑은 이미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웨이터는 나를 위해 조그만 테이블을 만들어 주었다. 스플리트에 도착하기 전부터 모둠 생선 요리를 먹을 거라고 벼르고 있었는데 웨이터가 혼자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라고 주의를 준다. 다른 테이블에 놓인 모둠 생선 요리를 보니 그의 말이 맞을 것 같았다. 필시 반은 남겨야 할 것 같았다. 혼자 하는 여행의 한계를 새삼 곱씹으며 먹물 리조또와 작은 해물 요리 하나를 시켰다. 와인을 마시고 싶었지만 후덥지근한 날씨가 맥주를 마시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는 Riva 거리를 거닐다 Diocletian 궁전 앞 광장에 도착했다. 이곳 레스토랑에서 꽤 훌륭한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광장 계단에 앉아서 맥주를 주문할 수 있었다. 기대하지도 못했던 훌륭한 어쿠스틱의 라이브 음악을 늦은 밤까지 즐기다가 숙소로 돌아와 내일의 산행을 준비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4시 알람이 울렸다. 평소처럼 알람을 끄고 다시 잠을 청하려다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Makarska로 이동하는 새벽 5시 버스를 타야 한다. 슈퍼호스트 청년의 부모님은 아직 자고 있을 터라 꼼꼼한 세수로 샤워를 대신하고 어제 슈퍼마켓에서 사다둔 요거트와 과일로 아침을 먹었다. 아직 바깥은 깜깜하고 기온은 낮다. 쌀쌀한 날씨를 무릅쓰고 반바지 차림으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이동하니 나와 비슷한 복장의 청년이 이미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너무 일찍 도착해 버려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만 버스는 고맙게도 정시에 도착해 지연 없이 출발해 주었다. Makarska에 도착해 미리 머리에 그려 두었던 지도를 따라 등산로를 찾아 오르기 시작했다. 30분쯤 이정표를 따라다니며 주택가를 지나니 등산로로 들어가는 조그만 길이 나왔다. 기상 예보에선 이 날 최고 기온이 36도에 다다를 것이라고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예상되는데 내가 오르는 산은 돌과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라 그늘 찾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3리터 분량의 물과 에너지를 채워 줄 시리얼 바를 몇 개 준비해 둔 터였다.


1422m이란 높이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일까. 등산의 난이도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등산 시작 지점의 해발이 무척 낮아서 체감한 등산 난이도는 한라산을 오르는 것보다 훨씬 높았던 것 같다. 하지만 아드리아해를 옆에 끼고 사람을 만나지 않고 오로지 나 혼자만의 자연을 즐기며 오르는 등산길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딱 한 명의 등산객을 만났는데 스플리트 버스 정류장에 나보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루마니아 청년이었다. 그늘이 많지 않은 곳이라 땀을 식힐 곳을 어렵게 찾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루마니아 청년은 크로아티아에 머무는 5일 동안 5개의 봉우리를 오르는 진정한 등산인이었다. 오늘 Vosac을 마지막으로 지중해의 몰타섬으로 옮겨 그 섬의 산들을 정복할 예정이라고 했다. 난 어디 가서 하이킹을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겠구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루마니아 청년의 정복 정신이 부럽지는 않았다. 루마니아 청년은 내게 즐거운 산행길이 되길 빈다고 말하고는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나는 과하다 싶을 만큼 아드리아해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산을 올랐다.

Kruska와 Strbina라는 멋진 뷰 포인트들을 지나 정오가 한 참 지나서야 정상에 도착했다. 능숙한 등산인이라면 이미 한 시간 전에는 도착했었어야 할 터였다. 정상에 도착할 무렵엔 이미 3리터의 물이 바닥난 상태였다. 다행히도 정상에는 조그만 카페가 있었는데 얼음처럼 차가운 물과 음료수를 구입할 수 있었다. Vosac정상에서 2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낸 후 길을 되짚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르는 길만큼이나 내려가는 여정 역시 힘들었다. 특히 조그만 돌들 때문에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다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느라 다리가 저렸다. Split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 시간에는 넉넉히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가는 버스 역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유럽에 살다 보니 버스나 열차가 제시간에 도착하고 출발해 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크로아티아의 이동 수단들은 독일의 그것보다 훨씬 믿을만했다.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어제 갔던 레스토랑을 다시 찾을 생각이었는데 종아리가 저려서 그곳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Riva에서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어 트뤼펠향이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가 트뤼펠을 가득 머금은 리조또를 주문했다. 오늘은 기어이 와인을 한 잔 마시리라 마음먹었기에 트뤼펠에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받아 마셨다. 아직 초저녁이라 Diocletian 궁전 근처 골목들을 마음껏 돌아다니다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의 목적지는 Hvar섬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Split 시내를 산책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돌아와서 9시쯤 페리를 타고 Hvar섬으로 이동했다. Hvar섬의 선착장이 있는 중심가는 클럽이 많고 관광객들이 몰리는 핫스팟이다. 나는 그곳에서 Hvar 섬을 동서로 순회하는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떨어진 Milna라는 작은 마을로 이동했다. 구글 지도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자갈밭으로 이루어진 작은 해변이 있다.


Milna해변에서 신나게 해수욕과 일광욕을 즐기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이곳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 아니라 한적할 뿐만 아니라 섬이라서 투명한 물 빛을 가지고 있었다. 해변에는 조그만 Bar가 운영되고 있었는데 역시 핫스팟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음료가 스플리트 시내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저렴했다. 스마트폰, 지갑, 카메라 등 지켜야 할 물건이 많아서 물에 오랫동안 들어가 있기는 불안했다. 물속에 가지고 들어갈 있는 조그만 방수 백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자 제품까지 들고 들어가긴 불안해서 전자 제품들은 가방과 함께 자갈 위에 놓아두어야 했다. 내 짐이 있는 자리에서 너무 멀리 들어갈 수도 없었고 짐에서 시선을 놓을 수도 없었다. 이 역시 혼자 하는 여행의 큰 단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ilna에서 꿀 같은 시간을 보냈다. 아쉬웠지만 오늘 안에 Hvar섬의 구시가지인 Stari Grad도 돌아봐야 했기에 해변에 준비된 간이 샤워장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미리 확인해 뒀던 버스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탔고 버스는 Stari Grad에 정확히 나를 내려 주었다.


Stari Grad는 고즈넉하고 한가로운 곳이었다. 관광객들은 Hvar섬에 클럽을 즐기러 오기 때문에 이런 곳을 찾지 않는다. 덕분에 이런 아름답고 고즈넉한 구시가지를 아무런 스트레스 없이 혼자 즐길 수 있었다. 이 복잡스러운 8월의 관광지에서 이렇게 사람이 없는 곳을 거닐 수 있다는 것은 진정한 축복이다. 이곳에는 아기자기한 레스토랑이 골목마다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 가정집에서 허가 없이 운영하는 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레스토랑 답지 않은 레스토랑들도 있었다. 걔 중에는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에 테이블이 딱 하나만 있는 곳도 있어서 저기는 혼자라서 들어가고 싶어도 부담스러워 못 들어가겠다 싶은 곳도 있었다. 혼자 하는 여행만 아니었어도 저곳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이 번 여행에서 세 번째로 느끼는 혼자 하는 여행의 아쉬움이었다.


이 작은 섬에서는 고대 그리스 유적부터 나폴레옹 전쟁의 건축물까지 거의 2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다. Stari Grad는 2400년 전의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건설된 도시이다. 고대 그리스의 건축물과 공공 인프라스트럭쳐의 모습을 많은 곳에 복원 유지하고 있는데 그 생김과 쓰임이 결코 이질적이거나 어색하지 않다. Stari Grad의 골목골목을 머릿속에 담아 두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걸어 다녔다.


너무 늦기 전에 Split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페리를 타기 위해 Hvar 선착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섬에서 하룻밤 보내지 못한 것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다. 이런 아름다운 섬이 광란의 파티 문화로만 소비된다는 것이 무척 아쉽다.


스플리트에 돌아온 시간이 너무 늦어 대부분의 레스토랑들이 문을 닫고 있었다. 부랴부랴 관광객들이 많이 모이는 Riva거리에서 관광객 프리미엄을 얹은 가격으로 저녁을 먹어야 했다. 이렇게 이번 여행의 반을 마치게 되었다. 내일은 버스를 이용해 두브로브니크로 이동한 후 남은 여행의 반을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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