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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하이커 Aug 25. 2023

크로아티아에서 만난 시간 여행자

크로아티아 - 떠나며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사이에 두고 동전을 던진 날로부터 꼭 한 달 만에 운명의 선택을 당한 크로아티아를 떠난다. 많은 산을 오르겠다고 다짐하고 수많은 하이킹 루트를 점검해 왔건만 제대로 된 하이킹은 Vosac을 오른 것 말고는 없었다. 오히려 계획에도 없었던 물놀이를 신나게 해 버렸다. 모두 날씨의 농간인 것이다. 8월의 뙤약볕이 이렇게 살인적일 줄은 몰랐다. 


7박 8일의 짧은 휴가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한 시간을 후회 없이 채운 알찬 여행이었다. 덕분에 삶의 에너지를 가득 채웠다. 이 에너지를 아껴 쓰면 한 동안은 집과 회사를 멍하게 오가더라도 마음의 허기가 지지는 않을 것 같다. 

떠나면서 집주인 마야를 만났다. 그녀의 어린 딸은 여전히 낮을 많이 가린다. 엄마 뒤에 숨어 빼꼼히 쳐다본다. 어린아이들의 경계심을 푸는 기술은 따로 배우지 못했기에 마야의 딸에게는 멀찌감치서 손만 흔든다. 마야는 내게 '어떤 호스트들이라도 환영할 게스트의 모범'이라고 리뷰를 남겼고, 나는 그녀에게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슈퍼호스트 중의 슈퍼호스트'라는 리뷰를 남겼다. 




스플리트로 돌아가는 방법으로 바닷길을 택했다. 출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항구에 도착해 버려서 배가 올 시간을 기다리려고 그늘을 찾아 앉았다. 더위는 아직 견딜만하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을 향해 앉아 있었기에 반은 강제적으로 도착하는 버스들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유독 눈에 띄는 승객이 하차를 하는 게 보였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버스 승객은 내가 있는 방향으로 오는 것으로 보아 역시 배를 이용해 스플리트로 가려는 듯했다. 그 승객은 빨간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를 쓴 아시아인 여성이었는데 자신의 몸집만 한 갈색 슈트케이스를 끙끙거리며 들고 오고 있다. 바퀴도 달리지 않은 앤틱 한 슈트케이스. 저런 걸 도대체 어디서 구했을까. 짙은 파란색 바탕에 하얀 동그라미가 잔뜩 그려진 윈피스 의상에 모자에 둘러진 리본과 똑같은 색상의 허리끈. 아무리 보아도 2000년대의 복장이 아니다. 마치 지브리 애니메이션쯤에나 등장할 인물이다. 코믹콘을 참여하는 게 아니라면 분명 타임머신을 타고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그 시간 여행자는 숨을 크게 한 번에 뱉어내고는 내가 앉아있는 그늘로부터 좁다랗게 이어진 맞은편 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코믹콘을 참가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과장된 화장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특징 같은 걸 두각 시킨 변장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저 슈트케이스는 진짜다. 어디선가 복고풍 모양의 여행가방을 모방해 만든 현대의 물건이 아니었다. 세월을 고스란히 덮어쓴 연한 갈색 가죽의 가방에는 두 개의 짙은 갈색 가죽끈이 가방의 삼분의 일 지점과 삼분의 이 지점쯤을 따라 빙 둘러서 감싸고 있었다. 가방의 모서리마다 두꺼운 가죽으로 보호대가 있었는데 그중 한 모서리가 낡아서 너덜거리고 있었다. 분명한 시간 여행자다. 


배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올라타기 시작하자 시간 여행자도 가방을 두 손으로 잡고 오른쪽 허벅지 힘을 이용해 가방을 든 채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며 보기에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필시 손잡이를 놓쳐 가방을 바다에 빠뜨리거나 뒤를 따르는 내게 굴러 떨어뜨릴 것이다. "제가 돕게 해 주세요". 시간 여행자는 놀란 눈으로 잠시 바라보더니 괜찮다고 했다. 그렇지만 배로 오르는 나무 판의 절반 지점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내게 손잡이를 넘겨야 했다. 


배가 출발하고 두브로브니크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지난 삼 일간의 여정이 꿈처럼 아련하게 떠올랐다.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크로아티아의 차례가 다시 돌아올 때쯤이면 지금의 크로아티아가 아닐 것이다. 이 모습의 크로아티아를 다시 보려면 시간 여행자에게 타임머신을 빌려야 할 것이지만 그가 쉽게 그것을 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Vosac 정상에서 바라본 아드리아해나 Srd 언덕에서 바라본 아드리아해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는데 막상 배를 타고 이동하는 아드리아해는 거센 바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갑판에서는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었다. 결국 갑판에 조금 서 있다 선실로 돌아오기를 무한반복하며 기나긴 항해 시간을 버텨야 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꾸준하게 갑판에 서 있는 시간 여행자. 시간 여행자는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기에 햇빛을 이겨내고 있었다. 다만 심한 바람으로부터 모자를 지키기 위해 왼쪽 손으로 모자를 누르고 있거나 오른쪽 손으로 모자를 누르고 있기를 무한반복하고 있었다. 


시간 여행자와는 여정의 반 이상이 지나서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여행자는 배를 탈 때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했고 나는 가방이 무겁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가방은 바위를 넣은 듯 무거웠고 들어 올리면서 저절로 끙하고 신음이 나오게 만들었었다. 경량화되기 전의 타임머신 초기 모델이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행자가 무사히 자신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선 때도 도와주겠다고 했다.


시간 여행자는 일본인이었다. 도쿄의 어느 백화점에서 사무직 일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여행을 너무도 좋아하는데 20년을 넘게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해외여행을 못해 봤다고 했다. 그럼 국내 여행을 많이 한 것이냐고 했더니 그것도 아니란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는 것이 맞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그동안 좋아하는 것을 많이 못하고 살아왔다고 했다. 내가 쳇바퀴 일상을 이겨내기 위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여행을 다니는 것처럼 시간 여행자도 비워진 병을 채우려고 첫 해외여행을 감행한 것이다. 나와 다르게 시간 여행자는 그 병에 자존감을 채우고 싶다고 했다. 시간 여행자는 두브로브니크가 여행 시작 지였고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도 여행할 생각이라고 했다. 스플리트에서는 약속한 대로 가방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었고 Hvar섬을 꼭 가 보라는 선행자의 조언을 건네고는 헤어졌다. 점심을 먹으면서 가방에 대해 묻지 못한 게 생각나 무척 아쉬웠지만 사실이야 어떻든 내 상상보다 흥미롭진 않을 것이다.


스플리트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백일몽에 빠져본다. 벌써부터 다음 여행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하고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으로 돌아가 보기도 한다. Vosac을 향해 오르는 길을 다시 복기해보기도 하고 Srd에서 내려오며 바라본 아드리아해를 다시 눈앞에 펼쳐 보기도 한다. 두브로브니크에 가며 가슴에 돌돌 말아 둔 수평선을 다시 펼쳐 보다가 Vosac 등산길에서 만난 루마니아 청년이 지금은 몰타의 어느 산을 오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지금쯤이면 몇 개의 산을 정복했으려나. 나른하고 늦은 점심이 그렇게 끝나고 나는 현실로 돌아가는 항공편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번엔 작정하고 알뜰하게 여행하려고 마음먹었던지라 생각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 들었다. 관광객 프리미엄이 가장 많이 붙는 8월의 중순에 한 여행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정리해 보자면 항공권으로 왕복 340유로, 8일간 숙박비 480유로, 대중교통과 페리 비용 약 100유로, 나머지는 거의 식사비로 총 1500유로 (약 215만 원)가 들었다. 이건 혼자 한 여행이라 가능한 비용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가성비 넘치는 에너지 수급을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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