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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하이커 Sep 23. 2023

일찍 일어나는 여행자, 안개에 묻힌 베니스를 보리라

이탈리아 - 부라노섬

해가 지는 시간 푸른빛의 베니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어스름 속에서 베니스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아쉬울 정도로 짧다. 하지만 해가 진 후의 대운하 주변은 현란함과 번잡함으로 가득 찬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관람차가 쉴 새 없이 돌고 카지노 주변으로 뿜어져 나오는 광해는 머리를 지끈거리게 한다. 20년 전 베니스의 밤 시간이 차분하고 우수에 차 있는 듯한 느낌을 남긴데 비해 다시 방문한 베니스의 밤은 과도한 역동감을 느끼게 했다. 대운하 주변에서 밤 시간을 보내다가는 시각과 청각에 많은 무리가 갈 것 같아서 우리는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해가 지기는 했지만 동절기였기 때문에 시간상으로는 겨우 저녁 무렵이었다. 


좁은 골목 골목을 누비다보면 차분한 모습의 베니스를 찾을 수 있다.

돌아가는 길에는 일부러 좁은 골목들을 이용했다. 번잡함을 피해 다니다 보니  좁은 운하를 가로지르는 동화스러운 다리와 함께 고즈넉한 모습의 레스토랑을 장식한 촛불램프가 눈에 띄었다. 레스토랑은 고급스러웠고 관광객들이 다닐 만한 곳이 아니어서 저녁시간임에도 빈자리가 꽤 있었다. 레스토랑 직원들은 무척 여유로워 보였다. 이곳에서 저녁을 먹었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를 했지만 우리의 저녁식사는 이미 관광지 핫스팟의 어느 파렴치한 음식 사기꾼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당한 후였다. 그래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기억하고 있던 베니스의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서 많은 위안을 받았다.




Librairie Acqua Alta

Librairie Acqua Alta는 주인장 할아버지 Luigi Frizzo와 어림잡아 6마리는 되어 보이는 고양이들이 공동 운영하는 책방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는 조금은 과도한 별명을 붙인 이 책방은 엄청난 수의 책이 두서없이 빼곡히 쌓여있지만 그 때문에 잘 정돈된 카페 느낌의 서점들과 사뭇 다른 정취를 느끼게 한다. 이 책방에는 책으로 계단을 만든 작은 정원도 있고 운하로 연결된 뒷문도 있어 책방에서 바로 곤돌라를 타거나 내릴 수도 있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그냥 특이한 책방 정도로만 알려졌던 이곳이 지금은 관광객들의 주요 방문지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책 보다 기념품이 더 많이 팔리게 되었는데 책방 주인은 이런 인기를 굳이 거부하지도 이용하려 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여기는 명색이 책방임에도 불구하고 책들보다 책을 침대 삼아 낮잠을 즐기는 고양이들이 더 인기가 있다.




일찍 일어나는 여행자는 이런 풍경의 베니스를 만날 수 있다.


해가 지는 시간의 베니스보다 아름다운 풍경을 꼽으라고 한다면 안개에 묻힌 베니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안개에 묻힌 베니스를 보기 위해선 아주 이른 시간에 숙소를 나서야 한다. 이르면 이를 수록 좋을 것이다. 지난밤 번잡함을 즐긴 여행자들은 아직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단체 관광객들의 스케줄은 아직 두 시간은 더 있어야 시작할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 출근하기에도 이른 시간이라면 안개 덮인 베니스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다. 


고즈넉한 골목길을 걸어도 좋고 일찍 일어난 곤돌라 뱃사공과 흥정을 해봐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바포레토(Vaporetto)를 탔다.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 몇 이외엔 낮시간처럼 혼잡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탄 바포레토는 북쪽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대운하를 따라 이동했다. 




Isola di San Michele


Isola di San Michele는 베니스의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베니스와 유리 공예로 유명한 무라노(Murano) 섬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 섬은 거주민 없이 거대한 공원묘지를 이루고 있는 섬이다. 섬에는 13세기 무렵 지어진 수도원에서부터 15세기에 지어진 교회당까지 여러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 섬에는 유명한 이탈리아의 음악가들이 묻혀 있다고 하는데 음악의 문외한인 내게 모두 생소한 이름들이었다.




집 색깔과 집집마다 걸려있는 빨래들이 아기자기한 그림을 만든다.

부라노(Burano) 섬은 그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색으로 기억에 남을 곳이다. 지나칠정도로 짙고 화려한 색으로 건물을 칠하는데 집집마다 너무 다른 색들로 칠해져 있어 부조화 속에서 아름다운 조화가 생기는 곳이다. 안개 끼고 어두운 날에도 뱃사공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화려한 색상으로 집을 칠하던 전통이 이제는 의무가 되어 버렸다. 이 섬 주민들은 자신들의 집 색을 정할 수는 있지만 주변 집들과 어울리는 특정한 톤과 깊이로 색을 골라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 부라노 섬은 특별히 찾아야 할 랜드마크가 없다. 그저 아기자기한 카페를 찾아 들어가거나 빨래가 걸려 있는 집을 보는 재미가 독특하다. 좁은 운하와 그 양쪽으로 펼쳐진 알록달록한 건물들 자체가 이 섬의 볼거리인 것이다. 


대문 사진만 20장 넘게 찍은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라고는 죄다 남의 집 대문 사진이다. 다른 색의 조합으로 창들과 벽이 칠해져 있고 그걸 찍은 후 한 페이지로 모아보니 꽤 괜찮은 그림이 되었다. 집구경하다 지치면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그러다 에너지가 차면 다시 대문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길 한참 반복한 것이 부라노섬 일정의 전부였지만 결코 지루하거나 힘들진 않았다. 오히려 특급 관광지를 벗어나 이국적인 마을 풍경을 한가롭게 거닐어 볼 수 있어 좋았다.

운하 저편에 보이는 기울어진 첨탑

섬주민의 수가 약 4000명 정도인 부라노섬의 유일한 랜드마크는 1714년에 완성된 53m 높이의 기울어진 첨탑뿐이다. 섬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기울어진 첨탑 꼭대기에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설치되어 있는데 종이 설치된 꼭대기와 첨탑의 시작지점과의 차이가 무려 1.8m나 된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기울어진 탑들 중에서도 이 첨탑의 기울기가 가장 큰 것들 중 하나라고 하는 걸 보면 이탈리아에 기울어진 탑이 꽤 많은 것 같다.




베니스의 마스크샵
떠나기 전에 숙소 호스트의 추천을 받아 제대로 된 레스토랑을 찾았다.


베니스를 떠나기 전날 저녁, 첫날 경험한 악질 레스토랑의 악몽을 물타기 하기 위해 숙소의 호스트에게 추천을 받아 근처 레스토랑을 찾았다. 다행히 이곳은 손님들에게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식사 단계를 모두 거치라고 강제하지도 않았고 쓰레기 같은 음식을 내어 놓고 항의하는 손님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는 만행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우리는 해물 피자의 비주얼에 오히려 놀라기까지 했다. 피자 위의 해물이 너무 푸짐해서 해물만 거두어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았다. 


대운하, 두 칼레 궁전, 리알토 다리, 탄식의 다리, 산 마르코 대성당 등등 볼거리가 많은 베니스지만 이 섬은 이름 없는 골목들이 유명한 관광명소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다. 관광 부기가 조금만 빠져줘도 자주 찾아오고 싶은 곳이 분명한데 지금의 베니스는 요양과 치유가 필요한 곳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2024년부터 베니스를 찾는 관광객에게 하루 5유로씩의 입장료를 부과한다고 한다. 베니스를 오랫동안 아름답게 지키기 위해서 좋은 선택을 한 것 같다. 


20년 만에 다시 찾은 베니스, 마치 초등학교 때 짝사랑하던 누군가를 2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다. 아름답기만 했던 기억 속의 베니스가 관광객의 주머니만 바라보는 현실의 베니스에 의해 무너진 것 같은 기분이지만 또 다른 20년 후의 베니스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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