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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하이커 Aug 29. 2023

그리스의 외딴섬이 오롯이 우리만의 것일때

그리스 - 애기나섬과 아크로폴리스

어느 날 한국에서 친구 녀석이 덜컥 와 버렸다. "회사 그만두고 독일이나 놀러 갈까?" 하던 친구 녀석과의 통화에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야 어쨌건 친구 녀석이 덜컥 와 버렸으니 오지 말라고 하진 않았을 거다. 다른 용무로 왔다가 나를 잠시 보고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나를 보겠다고 일주일간 찾아오는 친구를 위한 프로그램을 미쳐 마련해두지 못했다. 부랴부랴 휴가는 내었지만 이제 뭘 하면 좋지? 거실 소파에 앉아서 같이 넷플릭스나 보고 있을 수도 없고 보게 할 수도 없다. 어찌 됐건 이건 나에게도 휴가니까. 


회사에서 제공하는 제휴 할인 프로그램에서 싼 여행 패키지라도 알아보려는데 그리스 여행 패키지가 꽤 저렴하다. 그런데 나는 패키지여행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예약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손을 움직이는 레버에 엄청난 저항을 가하고 있었다. 결국 페이지를 닫아 버리고 직접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하기 시작했다. 


3박 4일 정도면 충분한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이 될 듯했다. 때는 2월 초, 확실한 비수기의 장점이 있었다. 이지젯을 통해 베를린, 아테네 왕복 항공권을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65유로)에 구입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크로폴리스 셀렉트 호텔이라는 꽤 괜찮은 3성급 호텔을 1박당 53유로에 예약할 수 있었다. 패키지여행 비용이 저렴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패키지여행 비용이 무척 저렴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에 비해 반 값도 되지 않는 가격에 항공권과 호텔 예매를 마쳤다.


사실 이 여행에는 약간의 사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동안 그리스의 칼람바카를 꼭 가보고 싶었는데 아테네에서 칼람바카까지 가기가 쉽지 않아 혼자 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기회에 칼람바카도 가고 델포이도 다녀오겠다고 마음먹었다. 결국 델포이까지는 못 갔지만 칼람바카를 다녀오고자 하던 소망은 이루었다.




친구는 좀 엉뚱하다 느꼈을 것이다. 자기한테는 독일도 충분한 해외여행일 텐데 무슨 갑작스러운 그리스 타령인가 싶었을 법하다. 그런 친구에게 평소에 아껴 둔 설득의 화법을 발휘했다. 독일에 있어봐야 이 계절에 갈만한 곳은 없다고 했고, 내가 거주하고 있는 도시를 나가면 숙박비가 말도 못 하게 많이 든다고 하기도 했으며, 그리스 가서 지중해의 풍성한 해산물을 마음껏 먹고 오자고도 했다. 설득에 활용하긴 했어도 모두 맞는 말이었다. 더욱이 내 금쪽같은 휴가를 친구랑 거실에 앉아서 넷플릭스를 보거나 술이나 마시며 보낼 수는 없었다. 


도착 다음 날은 베를린 구석구석을 같이 돌아다닌 후, 3일째 되는 날 아직 시차가 채 적응되지 않은 친구를 깨워 아테네로 향하는 비행기에 실었다. 아테네 공항에서 호텔을 찾아가기 위해 지하철 Blue Line을 타고 Syntagma역까지 옮긴 후 다시 Red Line으로 갈아타서 Syngrou-Fix까지 이동했다. 아크로폴리스가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에 호텔 아크로폴리스 셀렉트가 있었다. 이 호텔의 루프탑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의 야경에는 감탄을 아낄 수 없었다.  


나무랄데 없는 아크로폴리스 셀렉트 호텔 레스토랑에서의 첫 날 저녁 식사

호텔 체크인이 저녁 7시 무렵이라서 어쩔 수 없이 도착한 날은 저녁사냥 말고는 특별히 할 것이 없었다. 호텔 주변에서 먹을까 하다가 마침 비도 오는지라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기로 하였다. 호텔 레스토랑은 루프탑 층에 있었고 아크로폴리스의 야경을 감상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위치였다. 호텔 레스토랑의 음식은 재료의 신선도에서부터 맛과 플레이팅까지 어디서도 점수를 깎기 힘들었다. 지중해에서는 절대로 생선 요리만 고집하는 나는 생선 요리를 시켰고 고기 없이는 한 끼도 못 먹는 친구 녀석은 육류 식사를 시켰다. 호텔 레스토랑 치고 식비는 음료포함 30유로 정도로 충분히 부담 가능한 가격이었으나 평생 여행이라고는 다녀 본 적 없는 친구 녀석은 필시 놀랐을 것이다. 다음날부터는 가성비 따져가며 저녁을 먹겠다고 다짐하고 일찌감치 객실로 돌아와 다음 날의 일정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우선 칼람바카를 다녀오고 싶었지만 마땅히 칼람바카를 갈 방법이 없었다. 열차를 타려니 새벽 열차를 타야 하고 그러자면 이미 늦은 밤이었기에 내일 칼람바카를 여행할 방법은 없었다. 차량렌트는 비용면에서도 활용도면에서도 내키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칼람바카는 내일 밤 열차를 타고 가서 그 이튿날 여행하고 돌아오기로 하고 내일은 피래우스 (Piraeus) 항구에서 페리를 이용해 근처 애기나섬에 다녀오기로 했다. 




내가 여행할 때 신줏단지처럼 믿고 지키는 것이 하나 있다면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그래서 조식 시작 시간이 빠른 호텔은 나에게 숙박 전부터 큰 점수를 얻곤 한다. 불쌍한 친구 녀석은 내가 계획한 스케줄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았고 관심조차 없었다. 이 날 아침도 여느 때의 휴가처럼 (혹은 어제저녁처럼) 느지막이 일어나 시내를 몇 발자국 걸어 다니다 이국적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서 사진이나 몇 장 찍고 음식점이나 고르러 다닐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내가 아침 6시에 깨울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나하고 둘이서만 여행을 해 보는 게 처음이라서 내 여행 스타일을 알리가 없다. 눈꺼풀도 제대로 못 떼던 친구는 어기적 거리다 기어이 아침을 거르고 말았다. 아침 배편을 놓치면 오늘 하루를 공치게 되기 때문에 친구의 공복 사정은 나중에 해결할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 첫 배 놓치면 다음 거 타면 될 것 아니냐며 투덜거린다. 안타깝지만 다음 배는 없다. 

Temple of Aphaia


지하철을 두 번 타고 Piraeus 항구로 이동해서 8시 조금 지나 출발하는 고속 페리에 탈 수 있었다. 표를 미리 예약할 수 없어서 항구 주변에 있는 여행사에 들어가서 1인당 왕복 23유로에 표를 구입했다. 애기나 섬에 도착하니 9시가 한참 지나 있었다. 첫 목적지인 아파이아 신전(Temple of Aphaia)까지는 버스를 타고 갔다. 10시 15분 버스가 있어 편도 2유로에  Agia Maria까지 이동하고 그곳에서 신전까지는 걸어서 갔다. 돌아오는 버스 편의 시간이 좀 애매했지만 어떻게든 되겠거니 하며 우선 떠났다. 비수기의 그리스는 참 매력적이다. 아테네 시내에는 단체 관광객으로 북적이겠지만 아테네에서 배를 한참 타고 떠나온 애기나섬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사실은 애기나섬도 성수기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다.

비수기의 애기나섬 관광객도 없지만 문 연 가게도 거의 없다.


사람 없는 아파이아 신전 곳곳에서 사진을 찍고 놀다가 신전 주변의 간이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는 버스를 탈 수 있을만한 곳까지 걸어가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아직 돌아가는 뱃편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은지라 섬을 이곳저곳 살펴볼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해변가까지 와서도 점심을 먹을만한 가게를 찾지 못한 우리는 하릴없이 정차해 있는 택시를 향해 걸어갔다. 항구까지의 택시비를 물어볼 심산이었는데 택시 운전사가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나는 엉뚱하게 짧은 투어를 해 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흥분된 말투로 기꺼이 그러마 했고 우리는 20유로로 항구로 돌아가는 길에 볼거리 몇 곳과 수도원 한 곳에 내려서 기다려 주는데 합의를 했다. 


어서 오시오, 여행자여.

성 넥타리오스 대성당은 시간과 거리상의 문제로 방문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택시 운전사의 도움으로 제법 넉넉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성당 내부와 웅장한 정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시 운전사가 밖에서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우리가 아니었어도 손님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을 테지만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다행히 대성당이 거의 텅 비어 있어 구석구석 다 돌아보는데 30분 정도 걸렸는데 성수기였다면 수많은 인파 때문에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택시로 돌아오니 택시 운전사가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대성당의 웅장함에 대해 조금은 과도하게 칭찬을 함으로써 그녀를 만족시켜 주었다. 우리는 택시 운전자에게 로컬들이 갈만한 좋은 레스토랑을 좀 알려줄 수 없겠냐고 물었고 그녀는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하고는 항구 주변에 비슷비슷해 보이는 레스토랑 중 한 곳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제대로 된 추천이었는지 점심은 꽤 괜찮았다. 튀김 생선 요리와 해산물을 시켰는데 신선하고 잘 만들어진 요리가 메인디쉬, 음료, 디저트까지 포함해서 1인당 16유로 정도로 꽤 저렴한 가격에 제공되었다. 식사 후에도 뱃시간까지는 많이 남아서 물에 발을 담그고 놀다가 마지막 뱃편을 이용해 아테네에 돌아왔다. 




아크로폴리스보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주변에 있는 바위 언덕이 진정한 뷰 포인트다.

친구는 이미 어느 정도 녹초가 된 것 같은데 내 일정은 아직 끝이 아니다. 나는 이날 저녁 반드시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오를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테네 도착하자마자 아크로폴리스로 향하는 오르막을 달렸다. 힘들게 오른 언덕 끝에 보인 것은 굳게 닫힌 입구. 아크로폴리스의 입장 시간이 아슬하게 지난 터였다. 아쉬워하며 언덕을 다시 내려가려는데 아크로폴리스 입구 주변에 있는 바위 언덕 위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내 여행 센스가 갑자기 번뜩이기 시작했다. 아, 저게 진정한 뷰 포인트겠구나. 그 야트막한 바위 언덕을 오르자 아테네 전경이 훤히 보일 뿐만 아니라 뒤편으로는 아크로폴리스가 한 앵글에 잡히는 엄청난 뷰가 펼쳐졌다. 더욱이 노을이 지는 시간대. 아크로폴리스에서 단체 관광객들에 시달리는 것보다 훨씬 탁월한 선택이다. 게다가 입장료도 무료가 아닌가. 바위 언덕 위에서 한참을 노닐다 호텔로 향했다. 


운 좋게도 엄마표 음식이 나오는 저렴한 음식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 늦은 저녁을 먹고 칼람바카로 향하는 밤기차를 타야 한다. 열차는 밤 11시 55분에 있다. 우선 호텔 주변에서 음식점을 찾아보는데 비수기라서 그런지 일찍 문을 닫거나 아예 열지 않은 곳이 꽤 많다. 그래도 한참을 구글 지도를 들여다본 덕에 괜찮은 레스토랑을 찾을 수 있었다. 생선 요리와 오징어 요리를 하나 시키고 커다란 맥주로 오늘의 여정을 곱씹어본다. 화려하진 않지만 제법 정성들여 구운 게 분명한 음식들이 머스터드소스에 곁들여 나왔다. 내가 흔히 엄마표라고 부르는 풍성하고 가성비 높은 음식 스타일이다. 미리 검색해 보지도 않고 이런 좋은 음식점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나름 행운이었다고 본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후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가방을 챙겼다. 우리는 지하철 시간을 확인한 후 약간 휴식을 취했다. 지금 쪽잠을 자 버리면 나중에 열차 안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게 될 것 같아서 앉아서 쉬다가 깜깜한 밤에 다시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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