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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하이커 Aug 21. 2023

낯선 곳에서 낯선이와 만나는 설레임

크로아티아 - 두브로브니크 2

스플리트로 돌아가기 하루 전 날은 두브로브니크에서 보내기로 했다. 계획에는 없었는데 성벽을 올라가는 출입 비용이 꽤 비싸서 입장권을 싸게 구입하는 방법을 알아보다 Dubrovnik Card 24시간권을 구입하게 되었다. 이 카드는 250 쿠나 (약 30유로, 약 47,000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카드의 가격은 성벽 입장권을 따로 구입하는 것보다 조금 더 비싼데 성벽 입장권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두브로브니크의 대중교통 이용권 및 10개가 넘는 박물관의 입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묶음 상품이 시간상 또는 거리상의 이유로 모든 혜택을 사용하지는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두브로브니크 카드 역시 대부분의 경우 대중교통이 없는 성벽 내 올드타운에서 시간을 보낼 테니 대중교통 이용권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박물관을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아름다운 도시와 아드리아해의 풍광을 포기하고 10개가 넘는 박물관만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사실상 내게도 이 카드의 용도는 성벽 입장권과 해양박물관 입장권 정도밖에 없었다. 올드타운 이외의 두브로브니크를 여행한다면 2일권 이상을 사면 교통권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니 슈퍼호스트 마야가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눈치를 보니 오늘은 아침을 준비해 주지 않는 모양이다. AirB&B 설명에도 아침을 준다는 말은 없었으니 섭섭해할 일이 아니다. 마야에게 오늘 성벽을 오를 생각이라고 했더니 직사광선을 피하고 물을 많이 마시라는 조언을 해준다. 안 그래도 가는 길에 큰 물을 한 병 사들고 갈 계획이다. 마야의 집에서 올드타운의 입구로 가는 길에 핫도그 가게가 있어 아침부터 큼지막한 고기가 든 샌드위치로 식사를 마쳤다. 덕분에 점심은 걸러도 될 듯하다. 더욱이 이런 더위에 점심을 먹는 행위는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을 생산할 것 같았다.


두브로브니크 카드를 성벽에 오르는 용도로 개시했다. 성벽에서 올드타운 안을 바라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 시대의 어느 해양 국가로 순간 이동한 느낌이 든다. 아드리아의 진주 Dubrovnik, 나와 같은 시대를 산 PC 게임 세대라면 대항해시대라는 게임에서 Ragusa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도시. 이 도시는 불과 30년 전에도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불바다가 되었던 곳이다. 황폐화되었던 도시를 이렇게 깨끗하게 복원시켜 놓아 많은 사람들이 그 들의 버킷 리스트 아이템 하나를 체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성벽 위를 빙 둘러가며 혼자 관광을 할 수도 있고 시간에 맞춰 Tour에 참여할 수도 있었는데, 나는 짧은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겠다는 마음으로 혼자 돌아다니기로 했다. 8월 중순의 날씨에 그늘도 없는 성벽 위를 두어 시간 돌아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디든 조그만 그늘이 있으면 주저앉았다. 성벽 위에 있는 박물관들을 이용해 두브로브니크 카드를 활용하고 직사광선과 싸우며 도시를 꼼꼼히 한 바퀴 돌아본 후 성벽에서 내려왔다. 올라갈 때는 성벽이 열리기 전부터 기다리다 올라가서 몰랐는데 내려와 보니 성벽을 입장하려는 관광객들의 줄이 대략 몇 백 미터는 되어 보였다. 저들은 오늘 성벽을 올라갔다 내려오면 하루가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여행은, 그것이 관광이라면 더욱 아침 일찍 시작해야 한다.

성벽아래를 따라 돌며 올드타운을 보다가 성벽 외곽으로 뚫려있는 어마어마한 경치의 카페를 발견했는데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의 80%는 한국인이었다. 그 들의 말을 훔쳐들으니 이곳이 '부자카페'라고 부르는 곳이라 했다. 왜 유독 이곳에 한국인이 이렇게 많은가 의아해하다가 그 '예능' 프로그램 때문이겠구나 싶었다. 사실 올드타운 안에만 있을 예정이라면 아드리아해의 경치를 이곳만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은 없다. 좋은 사진을 건질 수 있는 곳임에도 틀림이 없다. 다만 주의하시길. 이곳의 음료수 가격은 어지간한 관광지의 바가지요금보다도 몇 배 높다. 직원들은 불친절하고 잘못하면 이해하지 못할 언어로 찰진 욕도 얻어먹는다. 욕은 그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는 음료를 시키지 말고 한 5분 정도 풍광을 감상하고 사진만 찍고 나가길 바란다. 어차피 앉아 있어도 북적거리는 관광객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관광객의 홍수가 일어나는 시즌의 여행은 언제나 여러 가지 이유로 즐겁지 못하다. 그래서 항상 조금이라도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아보는데 두브로브니크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기로 한 이상 그런 곳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제법 비싼 페리 요금 때문에 갈까 말까 망설였던 로크룸(Lokrum) 섬에 갔다 오기로 했다. 섬이라고는 해도 두브로브니크에서 눈으로 선명히 보이는 위치에 있다. 두브로브니크의 올드타운보다는 사람의 수가 적었지만 이곳도 북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 섬에서 한 시간 정도 짧은 하이킹을 하고 숲 속에 만들어진 자연풀장에 발을 담그고 한참을 쉬었다. 바위에 한참을 걸터앉아 있다가 점심을 거른 것을 심히 후회하게 되었다. 마야 집 근처의 핫도그 집에서 팔던 커다란 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결국 다시 성벽 안의 구시가지로 돌아가서 뭐라도 먹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배에 올랐다. 구시가지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금방 지난 시간이었다. 아주 작고 작은 골목에 들어가 가벼운 샐러드와 커다란 아이스크림 후식을 먹고 오늘 석양을 보기로 했던 Srd 산으로 가는 케이블카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Srd는 산이라고 하기엔 아주 낮아 많은 소갯글에 Srd 언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너무 낮아서 걸어 올라갈까 생각했는데 이미 오후 늦은 시간이라 올라가는 건 케이블카를 이용하고 내려올 때 걸어 내려올 계획을 세웠다. 이 날의 기온을 생각하면 탁월한 결정이었다. Srd는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데 많은 한국어 소갯글에서 '스르지' 도는 '스르지르'라고 읽는다 했다. 다행히 이 언덕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어야 할 상황은 생기지 않았다.


케이블카를 이용해 전망대까지 올랐더니 두브로브니크의 올드타운과 아드리아해를 한 앵글에 담을 수 있는 멋진 뷰가 나왔다. 그래서 '인생사진'이란걸 찍고자 하는 한국인 취미 사진가들이 기를 쓰고 모이는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늘 밑에는 무거워 보이는 카메라 장비를 설치해 두고 석양을 기다리는 동포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석양을 볼 수 있기를 바랐지만 아직 석양을 보려면 많은 시간이 남았고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드리아해의 석양은 이미 여러 번 보았기에 그냥 걸어서 하산하겠다 마음먹고 발걸음을 뗐다.


그런데 결국은 아드리아해의 석양을 보고 만다. 사실은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걸어내려 간 길이 잘못된 길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차들이 달리는 곳까지 도착했을 때 그 길이 갓길 없는 이차선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깜깜해져 가는 도로 위를 걷는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았기에 조금이라도 더 어두워지기 전에 다시 언덕을 올라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되돌아가자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테고 그러면 산속에서 칠흑 같은 어둠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언덕에서 내려오고 있는 차들을 잡아 세우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하고 갓길이 있는 도로까지만이라도 태워달라고 부탁해 볼 요량이었다. 몇몇 차 안에는 인생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동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 들은 결코 차를 세우는 경우가 없었다. 한 열대쯤 지나갔을까. 정원이 꽉 찬 승용차 한 대가 서더니 내게 무슨 일이냐 묻는다. 아랍인 가족인 듯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조금만 태워줄 수 없겠냐고 했더니 앞문을 열어 끼어 앉으라 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곳에 끼어 앉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조수석에 앉은 아랍인 청년의 무릎에 앉다시피 하여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못 받았다면 분명 위험한 결정을 해야 했었기에 죽음의 고비를 넘긴 심정이었다.


아랍인 청년은 나보고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나는 입에 배여 생각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사우스 코리아'라는 답을 신속정확하게 내뱉었다. 그 친구가 뒤를 바라보면서 '사우스 코리아'라고 반갑게 소리 지르자 뒷 좌석에서 예기치 못하게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엑소 좋아해요.'라는 또렷한 여자의 음성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불편한 자세에서도 뒤를 돌아보았는데 히잡을 한 소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한류를 처음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안녕하세요'라고 응답했지만 '엑소'를 모르는 터라서 함부로 그 들에 대한 평가를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그들이 나를 옮겨다 준 구간은 짧았다. 약 3분 정도 달려 구시가지의 어느 정류장 앞에 나를 내려 주었고 나는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한 후 그 들의 차를 배웅했다. 지난 30분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곱씹어보다 정말 큰일이 날 뻔했구나 하고 생각하니 다시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고 숨이 가빠졌다. 크로아티아의 어느 산속에서 불빛 없이 밤새 걷는 것이 위험했을까 아니면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위를 가로등도 없이 걸어가는 것이 더 위험했을까.




올드타운으로 다시 들어오자 긴장이 풀렸고 긴장이 풀리자 배가 고파졌다. 오늘은 두브로브니크에서의 마지막 저녁이기에 기억에 남을만한 곳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풍성하게 먹어야 한다. 그래서 올드타운에서도 가장 관광객 프리미엄이 많이 붙은 지역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해가 어느 정도 지긴 했지만 사람들이 저녁을 먹는 시간보다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덕분에 제일 규모가 커 보이는 레스토랑임에도 불구하고 일찌감치 야외 테이블 하나를 꽤 차고앉을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는 트뤼펠향으로 각인시키고 싶었다. 다른 음식도 좋지만 트뤼펠향이 가장 깊게 배어 나오는 음식은 리조또이다. 트뤼펠이 가미된 버섯 리조또를 시키고 크로아티아산 화이트 와인을 추천받았다. 메인 요리 후에는 뜨거운 애플무스를 감싼 팬케익에 초콜릿 소스를 얹은 디저트와 함께 더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사실 이렇게 먹고 일어났어야 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든 생기길 기다렸던 거 같다. 테이블을 치우고 맥주 한 잔과 조그만 오징어 튀김 요리를 시켰다. 오징어 요리는 나 혼자 먹을 것은 아니었고 테이블 주변에 동냥질하는 새끼 고양이와 나눌 생각이었다. 관광객이 넘치는 이 도시에서 새끼 고양이는 풍족한 음식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양이에게 오징어 한 조각을 건네려는 찰나, 누군가 'Excuse me, but..." 하며 익숙한 문장으로 말을 걸어온다.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준다고 뭐라고 하려나보다 했는데 누군가 내게 자리 합석을 허락해 줄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이었다. 시간은 이미 관광객들이 애타게 저녁 식사거리를 헌팅하고 다닐 시간이었고 이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여행객은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나를 유심히 보고 있다가 일행인 척하며 합석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침략적인 불청객의 요청이 불편했지만 어차피 맥주를 다 마시면 일어날 참이었고 길게 늘어선 대기 손님들에게도 미안해질 즈음이었기에 합석을 허락했다.


우리는 같이 앉아있기만 하기 어색해서 이것저것 스몰 토크를 시작했는데 어느덧 그 여행자와의 대화가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합석자는 수단인 어머니와 스웨덴인 아버지를 가진 독일 출신의 스위스 국적자라는 흥미로운 탄생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서로의 직업, 여행 이야기, 요즘 유럽의 정세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처음 일어나려던 시점에서 두 시간이나 더 시간을 사용하고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뜻하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두브로브니크를 생각하면 떠 오를 또 하나의 경험을 한 것이 뿌듯했다. 남은 밤 시간은 맥주를 가방에 채워 넣은 채 플라차거리에서 악사들의 음악을 듣거나 작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보냈다. 자정이 넘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는데 마야의 방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아침에 일찍 나가서 스플리트로 돌아갈 예정인데 인사나 하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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