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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아침 Oct 04. 2024

혼수와 핫도그를 맞바꾼 남자

- written by C

남편은 손님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음료잔과 음식 접시를 서둘러 치운다. 그는 종종 내가 마시던 커피 잔도 가져가서 홀랑 씻어 버린다. 설거지할 것들을 찾는 하이에나처럼 기민하다. 가게로 찾아온 친구들과 함께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는 경우에도, 그는 설거지를 자신의 몫으로 여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가 설거지를 미루는 일은 없다. 좋은 습관을 가진 남자다. '인간식기세척기'이라는 별명도 붙였다. 종종 친구들이 부러워한다. 다들 자기 남편 얘기를 꺼내며 한 마디씩 보탠다. “세상에. 저런 남편이 어디 있어?”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우리 영업장과 살림 공간은 한 건물 안에서 분리돼 있다. 영업시간은 아침 11시부터 저녁 9시까지이다. 저녁식사는 보통 영업 마감을 하기 전에, 내가 조금 일찍 집으로 들어가서 준비한다. 남편은 칼칼한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하고, 생선을 주재료로 쓸 때는 맑은탕을 선호한다. 이따금 청국장이나 된장국이 먹고 싶다고 할 때도 있다. 나는 부산스럽게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준비한다. 저녁 식사 고정 멤버는 다섯 식구 중 셋이다. 여든 다섯의 모친과 남편, 그리고 나.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이 길지, 먹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다. 맛있다, 고춧가루가 좀 맵다, 김이 다 떨어져간다, 등등 대수롭지 않은 대화가 몇 마디 오가는 사이에 식사는 끝이 난다. 지극히 한국적인 상차림과 한국적인 식사 풍경이다. 남편과 모친이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맨 마지막은 나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싱크대에 가득 쌓인 그릇들을 본다.
 
 일과가 끝났고, 밥도 먹었고, 바깥은 어둡고…. 그러니 설거지는 귀찮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 저 남편-식기세척기는 사용할 수 없다. 식기세척기는 아침 11시부터 저녁 9시까지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식기세척기 가동시간은 가게 영업시간과 동일하다. 그는 퇴근과 동시에 더 이상 싱크대에 손을 담그지 않는다.
 
 남편은 피자도 만들고 빵도 굽지만 다른 음식은 전혀 할 줄 모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할 줄 모르고 싶어 한다. 여태 그가 가스 불을 켜고 무언가 조리하는 모습을 본 게 손에 꼽을 정도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식사와 간식은 내 담당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이런 남편도 흔치는 않을 거다.
 
 “라면 한 개만 끓여 먹자.” 그는 야식을 즐기는 부류다. 특히 자정 무렵의 야식.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졸다 깨다 하면서 라면을 먹자고 옆구리를 찌르는 일이 허다하다. 어느 날은 냉동실의 순대를, 다른 날은 만두를 먹겠다고 한다. 내가 이제 막 깊은 잠으로 빠져들 순간, 그 달콤하고 포근한 순간을 귀신 같이 포착한다. 빠직! 못 들은 척 이불을 쓰고 돌아 눕는다. 그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다. 돌아 눕는 나를 아랑곳 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더 성가시게 보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척 연기를 한다. “으응, 조금 이따가.”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어금니를 으드득 깨문다. 두 시간을 버티기도 한다. 그러나, 진다. 정확히 말하면, 질린다. 포기를 모르고 라면 타령을 하는 남자에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더 참지 못하고 꽥 고함을 지르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버린다. 그가 씨익 웃는다. 새벽 두 시, 나는 라면을 끓여 그의 앞에 대령한다. 그토록 무도한 자는, 내가 씩씩거리며 뒤집어 쓴 이불을 패잔병의 무덤 삼아 라면을 먹는다. 후루룩.
 
 그는 분명코 훌륭한 식기세척기다. 하지만 가사노동을 하는 남자는 결코 아니다. 그는 설거지 담당 노동자로서 근면하다. 주말에는 더러 훈련된 식기세척기의 성능을 발휘할 때도 있다. 그러나 훌륭하고 드물게 수행하는 이벤트일 뿐이다. 그는 생계노동에 성실한 남자이며,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손가락도 까딱 않는 여느 가부장적인 남편들과 다르지 않다.
 
 며칠 전의 일이다. 모처럼 간밤의 야식 대첩에서 내가 이겼다. “핫도그 하나만 데워 먹자”는 그의 가식적인 청유형 문장을 끝내 못 들은 척했다. 그날의 소리 없는 전쟁은 그러니까, 그를 핫도그도 얻어먹지 못 하고 잠든 남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핫도그를 데우지 않았다. 이겼다! 이긴 줄 알았다. 매캐한 연기와 탄내로 가득한 집안은 적장이 휩쓸고 남겨진 접경지역 같았다. 적장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시커멓게 탄 핫도그의 그나마 멀쩡한 부분을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냉동핫도그는 전자레인지에서 1분 30초 내외로 데우면 된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읽는 남자지만, 조리법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깨치지 못한 생명체였다. 다이얼식 전자레인지를 되는 대로 휙 돌리고 무작정 기다린 것이었다. “어쩐지 좀 오래 걸리더라. 저걸 1분 30초에 어떻게 맞추지?” 2023년을 사는 사람의 대사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를 확 밀친 뒤 전자레인지 문을 열었다. 핫도그를 데운 접시가 보였다.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딥그린 접시, 내가 결혼이라는 걸 한답시고 혼수로 사들고 온 접시였다!
 
 세상에 이런 남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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