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결혼 후 나의 설날

나는 시댁을 가고 남편은 우리 집을 가고 아이는 할머니 집을 간다.

by 레이지살롱

명절 전날은 항상 부산으로 내려간다. 서울에서만 살아왔고 결혼 전까진 수도권 외엔 여행도 제대로 가보지 않았던 나는 부산 남자와 결혼해서 결혼 후엔 부산 가기를 밥 먹듯 하고 있다. 부산 시댁 방문으로 단련되어 웬만한 지방은 모두 가깝게 느껴지며 2-3시간 이동은 만만한 거리로 느껴진다. (나는 운전면허가 없기에 운전은 남편이 한다) 어쨌거나 뒷좌석에서 아이 시중들며 5-6시간 타고 다니며 차라리 내가 운전을 하고 말지라고 생각했으나 이미 뒷좌석 인생으로 이미 굳어버렸다.


명절이 되면 보통은 연휴 전날 휴가를 내서 새벽 5-6시에 출발하여 부산에 내려가면 오전 10시-11심쯤 도착해 그날은 시부모님과 부산에서 보내고 다음날 아침부터 시댁 큰집인 포항으로 갔다. 큰집에 미리 가서 음식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제사를 지낸 후 점심까지 먹고 포항에서 다시 부산을 갔다가 연휴 마지막 날 새벽에 서울로 내려가는 바쁜 일정으로 지난 8년간 명절을 그렇게 지냈다. 제사 음식은 어머님들이 거의 하시기에 음식 노동의 스트레스보단 서울에서, 부산, 포항으로 연휴 3박 4일 동안 매일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스트레스가 더 컸다.


결혼 전엔 제사도 없었고 귀성길도 없었기에 명절이 되면 서울에 차 없이 한산한 거리가 너무도 좋았는데, 결혼 후에 내가 그 도시의 혼잡함을 없앤 사람 중에 하나가 되었다. 결혼하고 보니 TV에서 보던 모든 모습들이 시댁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남자들은 거실에 모여 앉아서 TV를 보고 여자들만 음식 준비를 했다. 남자들은 식사 후 커피며 과일을 내오라 하고, 여자들만 좁은 주방에서 매끼 식사를 준비와 뒷정리를 하고 넓은 제사상에는 남자 어른들이 식사를 하시고 좁은 보조상에서 여자들이 대충 국도 없이 먹는다. 어머님과 어른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며느리라고 배려해주시고 챙겨주시기는 하지만, 제사도 지내보지 않았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며느리는 눈치 보며 주방에서 도울 게 없나 대기하다가 식사가 끝나면 열심히 설거지를 할 수밖에 없는 며느리일 뿐이다. 남편은 집에서는 집안일도 함께 잘하고 있는데도 명절 때는 그 거실 TV 무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이 너무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거늘 내가 바꿀 수 있는 문화가 아니기에 그냥 받아들이게 되었다. 8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2년 전 큰집 장남이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했다. 하지만 큰집 어른은 “여기 여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네가 설거지를 왜 하니 얼른 나와라”를 외치셨고 설거지 담당이었던 나와 큰집 며느리는 모른 체했다. 결국 큰집 아들과 우리 남편이 번갈아 가며 설거지를 마쳤고 '뭔가 변화가 시작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그 후로 시댁 큰집을 갈 수가 없었다. 그 뒤 2년 동안은 다른 문화가 펼쳐졌다.


코로나가 터져도 부산엔 내려가지만 우리 가족만 지내니 연휴 내내 이동하며 차막 힘을 경험하지 않아 좋았다. 그리고 포항에서 1박 2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부산에서 외식도 한 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이번 설엔 기분 낸다고 다 같이 만두 빚고 근처 서점 가서 아이 책도 사주고 공원 산책도 하고 윷놀이와 고스톱도 하며 제법 소소하게 명절 같이 보냈다. 물론 여전히 아버님이 주방에 들어가는 일은 없지만 남편이 같이 일하니 뭔가 불평등한 느낌은 덜했다.


보통은 길 막히는 게 싫어서 부산에서 서울 올라갈 때도 설 다음날 새벽 5시에 출발해서 집에 10-11시쯤 도착해 쉬는데 이번엔 남편이 시댁에 더 있고 싶어 했지만 설날 다음 연휴가 짧아 하루 더 있긴 부담이 되었다. 대신 설 당일에 점심 먹고 여유롭게 가려고 했으나 서울의 눈 소식에 늦은 아침을 먹고 부랴 부랴 급하게 나왔는데 사람들이 제일 많이 나오는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장장 10시간 가까이 걸렸지만 10시간이 걸리더라도 본인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며느리는 집에만 도착하면 되었다. 반면에 '우리 집'을 간 남편과 '할머니 집'을 간 아이는 급하게 나온 게 너무도 아쉬운 눈치였다. 아무리 시댁에서 잘해 주셔도 며느리는 며느리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아들이 집에 가는 것과 손주가 할머니 집에 방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니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지나고 나니 보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