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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ading Lady Sep 29. 2017

꽃과 연인의 이야기

문득 사진첩을 뒤적이다 보니 꽃 사진이 종종 보인다. 그러고 보면 남편은 연애 시절부터 꽃 선물을 자주 하곤 했다. 결혼한 지금까지도 종종 그렇다.


"난 꺾은 식물은 싫어."


우리 엄마는 종종 이렇게 말했지만, 엄마와 달리 화초 키우는 데 재능이 없는 나는,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어 꺾여진 식물이 가진 아름다움과, 그들이 마지막까지 내는 광채와 그로 인한 애잔함에 매료된다. 엄마 말대로 꽃은 너무나 약하고 금새 시들지만,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금새 특별하게 만드는 힘 또한 가지고 있다. 평범한 날을 기억하게 하는 힘도. 나는 그래서 꽃이 좋다.




1.

시작은 프리지아처럼

남편에게 처음으로 받았던 꽃은 노란 프리지아 한 다발이었다. 봄이 더디 오고 있는 쌀쌀한 날, 회사 앞으로 찾아온 그가 멋쩍게 꽃다발을 건네었다. 우리는 어둑한 청계천을 걸었다. 아직 나무들과 사람들은 회갈색인데, 그 꽃만 너무 샛노래서 마치 캄캄한 밤을 밝히는 초롱처럼 보였다. 프리지아가 고백에 적합한 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봄의 화사함을 여자의 마음에까지 물들게 하는 역할은 확실히 하는 것 같다.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다시 한 번 화사해진다. 2016. 3. 29.



2.

만개한 벚꽃은 거들뿐

순식간에 흐드러지는 벚꽃처럼, 우리도 금새 사랑에 빠졌다. 만발한 벚꽃으로 장관을 이룬 양재천에는 평일 밤에도 불구하고 꽃구경 나온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아니,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머리에 남아있는 건 그저 사방 어디에나 흩날리는 벚꽃의 흐릿한 핑크빛과 모여 있는 사람들 뭉텅이의 형체 뿐, 사실 이 즈음에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사진도 많지 않다.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 만으로 퇴근 후 짧은 데이트 시간은 턱없이 모자랐으니까. 이 벚꽃이 곧 지는 것보다 우리가 곧 헤어지는 것이 더 아쉬웠던, 그런 날들이었다. 감정이 벚꽃보다 더 활짝 피어났더랬다.


빨리 져버린대도 괜찮다. 내년엔 더 흐드러질테니. 2016. 4. 2.



3.

처음부터 알 수 있는 큰 존재감, 라넌큘러스 

오케스트라 사람들과 작은 실내악 공연을 했던 날, 남편은 무척 탐스러운 라넌큘러스를 들고 나타났다. 나는 라넌큘러스를 정말 좋아하는데, 어떻게 알고 이 꽃을 골랐을까 하고 내심 신기했다. 지금 우리는 서로의 지인들과 함께 자주 만나는 편이지만, 아직 이 시점에는 주변 지인들에게 소개한 적이 거의 없었어서 조금 어색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후 다양한 모임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때면,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남자친구의 존재를 알리는 수줍은 느낌과, 마치 곧 결혼할 상대에 대해 소개하는 진지한 느낌이 공존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것이 나와 정말 인연이라면, 오래 겪어보지 않아도 처음부터 알 수 있다.

보기만 해도 포실포실한 이 꽃이 나는 처음부터 좋았어. 2016. 4. 17.



4.
카네이션 한 송이의 역할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간 여행지는 부산이었다. 가정의 달 5월, 해운대를 걷다 보니 카네이션을 파는 노점들이 있었다. 우리는 부산에 살고 있는 내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남편은 곧 엄마가 되는 그녀에게 가벼운 선물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카네이션 한 송이를 샀다. 그리고는 왠지 갑자기 신이 나서 친구에게 주기 전 우리끼리 사진을 찍어댔다. 부산에서의 3일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우리는 꼼장어 구이를 시켰는데 산 꼼장어가 꿈틀대는 걸 보고 상당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왠지 그 꿈틀 꼼장어 동영상 무한반복 재생을 하며 한참을 놀았다..) 고작 호세꾸엘보 한 병을 구하려 오밤중에 해운대 편의점을 죄다 돌아다녔고, 결국 못 구했지만 괜찮았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시장에서 뭔가를 열정적으로 먹느라 심지어 돌아오는 기차편을 놓쳤고, 입석밖에 없는 다음 차에 낑겨낑겨 타고 오면서도 내내 깔깔댔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그저 마냥 즐거웠다. 2016. 5. 14.



5.

아무 날도 아닌 날은 더 의미있다. 꽃이 그날의 의미를 만들어 주니까.

아무 기념일도 아닌 그냥 어느 보통날의 꽃 선물, 그냥 지나가다가 샀다고 말해주는 게 고맙다. 이 세상에 신경쓰지 않은 꽃 선물은 없다. 아무리 지나가다가 사는 것이라도 신경을 안 쓰면 살 수 없는 게 꽃인 것이다. 그런 날의 꽃은 화려하기보다는 어쩐지 수수하고 소담했다. 그 꽃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는 더 고마워졌고 더 수줍어졌다.

블루래빗과 잘 어울리는 들국화 한다발. 2016. 5. 26.
이날은 왜 이만큼이나 화려한 분홍 장미를 주었어?  2016. 8. 20.
하얀 수국 한 가지로도 충분해. 2016. 9. 23.



6.

우리 이제 그만 화해하자..

처음 만난 지 백일째 되는 날, 우리는 엄청 다퉜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억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까맣게 지워졌다. 이날은 부슬부슬 여름비가 왔다. 퇴근 후 만나기로 한 레스토랑 앞에서, 남편은 장미와 작약이 섞인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신경쓴 티가 나는 꽃다발을 한아름 들고 미안하다고 하는 남자에게 매몰찰 수 있는 여자는 흔치 않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 작은 우산 속에서 우리는 화해했다.

앞으로도 가끔 다투겠지만 항상 사랑해. 2016. 6. 24.
작은 볼에 담가도 예쁜 개량장미와 작약



7.

결혼의 로망, 무엇이 채워줄 수 있을까?

여름, 대관령 평창국제음악제에 가는 김에 양떼목장에 들렀다. 결혼준비가 시작되고 있던 시점, 우리도 가볍게 '셀프웨딩스냅'이라는 것을 한번 찍어보고자.ㅎㅎ 변변한 장비도 없던 우리는 아주 오래된 하이브리드 디카와 휴대폰을 사용했고, 그 전날 남편이 선물한 꽃 중에서 수국만 빼서 부케 대용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목장에 핀 들꽃 몇 송이를 꺾어 화관도 만들었다. 돌이켜 보면 결혼준비 중 정말 행복한 시간은 이런 시간들이다. 결혼을 위해 어른스러워져야 할 때가 많았고 알아야 하는 것도 산더미인데다 절차대로 딱딱 진행되는 게 답답할 때가 있었는데, 그냥 재미로 해보자 했던 것들은 오히려 예비 신부의 설렘과 풋풋함만으로 채워지는 기억이 되었다. 실패해도 상관 없는 사진들이야말로 성공적인 추억으로 남은 것이다.


나 또한 결혼에 대한 소녀적인 로망들이 있었다. 그러나 인생 최대의 소비를 했던 결혼식도 그런 로망을 완전히 채워주지는 못했다. (어쩌면 소비를 충분히 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르지만.ㅎ) 지금 나의 로망이 있다면, 이 때처럼 가끔은 우리 둘만의 순수한 시간을 만들며 조금씩 그리고 멋지게 나이들어 가는 거다.  

들꽃으로 만든 화관
하늘색 수국과 잘 어울리는 우리 의상. 2017. 7. 29.



꽃이 실용적이지 않은 선물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무엇을 '실용적'이라고 여기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남편은 가끔 이야기한다. "꽃은 참 싼 것 같아. 널 이렇게 웃게 만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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