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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디 Jul 14. 2023

나무를 안는 사람

 아끼고 좋아하는 벗과 가벼운 산보를 했다. 우리는 1년에 한두 번 만나지만 정말로 정말로 서로를 자주 생각하는 사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말을 건넬 때가 있다. 하늘이 너무 진한 파랑일 때, 낙엽이 발에 삭삭 채일 때, 내리는 눈송이가 너무 커서 손바닥에 얹을 수 있을 때 그리고 나무를 안을 때. 우리는 여느 때처럼 거의 일 년 만에 만나 낮은 산을 걸으며 수다를 털었다.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진 나는 산을 내려오는 도중 이렇게 물었다.


 언니는 마음이 힘들 때 어떻게 하세요?


이 질문 안에는 적어도 열 몇 개의 질문이 생략되어 있었다. 언니, 너무 외로우면요? 언니, 작업하는 게 너무 지치면요? 언니, 가족이 미울 때는요? 언니, 막살고 싶을 때는요? 언니, 막 살고 싶지도 않을 때는요? …


언니는 음. 하더니, 잔디야 나를 따라 해 봐. 하고는 커다란 나무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번잡한 도시 가운데 솟은 낮은 동산인데도 갖은 소음을 이겨내고 내 몸통보다 두껍게 자란 나무가 꽤 있었다. 나는 언니를 따라 나무에게 갔다. 우리는 각자 한 그루씩을 앞에 두고 섰다. 언니는 천천히 팔을 십자로 뻗더니 나무를 감싸 안았다. 그러곤 화장기 없는 매끈한 얼굴의 옆면을 나무에 붙였다.


 잔디야 이렇게 해봐.


나는 우와! 아! 어? 네! 하면서 쑥스러워하다가 천천히 나무를 안았다. 까끌하지 않을까? 혹시 벼룩 같은 벌레가 기어 다니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얼굴의 옆면을 나무에 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동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나무는 아무것도 한 게 없을 텐데, 얼굴을 붙이니 거짓말처럼 방금까지 들리던 수많은 소리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그때 알았다. 오! 나무껍질에는 소음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나 봐! 그 조용함이 너무 좋아서 한동안 우리는 나무를 안고 정적을 즐겼다. 나는 매우 신기해하며, 언니는 신기해하는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소 지으며.



 그녀는 내가 살면서 가장 처음 만난 미술가다. 참 느리게 살면서도 불타는 열정으로 삶을 사는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처럼 사는 사람 같다. 그녀는 닥나무를 직접 재배하여 껍질을 벗기고 삶고 떠서 만든 한지에 그림을 그렸다. 몇 번 그를 따라 청주 어느 작은 마을에 종이 뜨는 곳을 따라간 적이 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우리는 오백살은 된 것 같은 나무의 팔 사이로 단단한 그물을 쳐 만든 해먹에 차례로 누워 나무 위에서 낮잠을 잤다. 참기름을 듬뿍 넣은 나물 비빔밤을 먹고 배를 두드리며 강 주변을 걸었다. 지금은 먼저 떠나신 온유한 명상가와 작은 꽃이 동동 떠다니는 차를 마셨다. 그런 여운은 평생 동안 나를 위로한다. 그녀는 나를 평생 위로하는 사람이다.


 나는 등산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따금 나무를 안으러 동산에 간다. 어때? 괜찮지? 하는 말이 쓰여있던 그녀의 동그란 눈빛을 떠올린다. 장황한 설명 없이 오로지 삶과 작품으로 언어보다 짙은 말을 하는 사람. 나무와 꽃과 돌을 손으로 매만지는 사람. 언제든 함께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 그 덕분에 이제는 나도 나무를 안는 사람이 되었다.



미술가 박예지나

instagram @stillpainter


나무 위에서 낮잠을 자는 신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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