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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리 Jun 23. 2019

6개월 반의 백수생활을 하며 잃은 것

(돈을 제외하고) 나를 떠나간 것들에 관한 기억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를 떠돌며 일한 지 6년 10개월, 시간 부자가 되기 위해 퇴사한 지 6개월 반이 흘렀다. 퇴사 후 두 달은 마치 제2의 고향과도 같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또 두 달은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태국 치앙마이에서 마지막 두 달 반은 나의 출처인 한국에서 보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곧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한다. 아직 뿌리가 덜 굵어진 탓인지 또다시 떠돌이 생활자가 되는데, 그전에 머리와 가슴에 담고 있던 생각들을 한번 펼쳐보려 한다.


어떤 선택이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나 역시 매달 들어오는 월급을 차치하고서도 퇴사 후 잃은 것(?)들이 있다.

한의원과 마사지샵을 사랑하던 내가 없어졌다.
정말 신기하게도 일을 그만두고 한 두 달쯤 지나자 고등학생 때부터 나를 괴롭히던 고질적이고 지독한 어깨와 목 주변의 뻐근함과 통증이 거의 없어졌다. 고로 내가 사랑하는 마사지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을 이유도 없어졌다. 태국 여행 = 1일 1 마사지 맹신자였던 나는 두 달 동안 태국에 머물며 마사지를 딱 두 번 받을 정도로 많이 변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브랜드의 세일을 기다리던 내가 없어졌다.

옷을 많이 구입하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몇몇 브랜드의 세일을 알리는 메일을 받으면 언제나 쇼핑몰로 달려가곤 했다. 퇴사 후에는 편안한 티셔츠와 펑퍼짐한 바지 혹은 심플한 원피스 한 두벌이면 충분했다. 옷이나 가방, 액세서리에 대한 관심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루에 커피를 두세 잔씩 마시던 커피 중독이 사라졌다.
모닝커피, 점심 식사 후 커피, 야근 확정 후(뭐, 거의 매일) 갑자기 출출하거나 졸릴 때 가장 생각나는 그대는 역시 커피. 평균 두세 잔, 어떤 날은 네 잔씩 마시던 그 짙고 향기로운 커피.
한 가지 반전은, 나는 내가 커피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사랑이 아니라 중독이었다는 것이다.
많이 바빴던 어느 날, 커피를 마시지 못한 채로 오후가 되자 정체모를 두통이 나를 지배하여 깜짝 놀란 때가 있었다. 두통은 카페인 중독의 가장 흔한 증상 중 하나라고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커피를 한잔 마시고 나니 마치 진통제를 먹은 것처럼 두통이 사라졌다.) 퇴사 후, 커피는 덜 마시고 과일과 야채를 섞은 스무디나 생 코코넛 주스, 물을 더 많이 마시게 되었다. 흠, 의도한 것이 아닌데도 그렇게 되었고 6개월이 지난 지금은 확실히 중독에서 벗어난 느낌이다. 사람이든 커피든 도박이든 알코올이든- 중독은 위험하다.


다양한 인간군상을 볼 기회가 없어졌다. 
살아온 환경이나 취향, 나이, 국적, 성격 등이 제각각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던 회사.
메일 주소의 @ 뒷부분이 동일하고 한 공간에 함께 앉았다고 해도 각자의 직급, 책임도, 의무도, 권한도 다른 그 소우주 안에는 나름의 삼라만상이 존재했다. 당연히 그만큼의 인간군상의 목소리를 듣는 일들이 많다.  
사람들 때문에 기쁘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배운 것도 참 많았다. 퇴사를 한 후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는 시간은.... 아, 참 좋았다.


핸드폰 메시지 / SNS에 쓸 시간이 없어졌다.

평일 아침부터 시작해 쉴 새 없이 울리던 핸드폰 알람. 메시지, 전화, 이메일 등 쉴 새 없이 확인할 것이 얼마나 많았던지. 일 때문에 만들어진 개인 채팅방, 그룹 채팅방의 대화는 끊임이 없었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핸드폰 확인을 하지 않을 때의 불안 때문에 친구를 만나서도 혹은 한국에 휴가를 와서 가족들과 밥을 먹으면서도 자주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곤 했다. (갑자기 확! 올라오는 스트레스르  억눌러가며)
퇴사를 한 후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채팅창 탈퇴. 조용한 핸드폰이 한동안 적응되지 않아 종종 나도 모르게 오른쪽 상단 버튼을 눌러 핸드폰 액정 알림을 확인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게다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신기하게도 핸드폰 메시지과 SNS에 쓸 시간이 사라져 버렸다.    


공휴일/휴가에 느낄 수 있는 거대한 행복을 잃어버렸다.

공휴일을 확인할 때의 기쁨, 달력에 체크할 때의 즐거움, 공휴일 전날의 설렘, 공휴일 아침의 짜릿한 행복이 전부 사라졌다. (<공휴일>이라는 단어를 <휴가>로 바꿔도 이 공식은 성립한다)
금요일, 월요일 혹은 수요일에 있는 선물 같은 공휴일.
혹은 몇 달간의 야근을 하며 끝낸 프로젝트 후 떠나는 휴가.
그럴 때 느끼는 짜릿함과 행복의 강도는 굉장히 컸다. 갈증이 심하게 날 때 참고 참고 또 참다가 잘 내린 차가운 맥주의 첫 모금을 삼킬 때만 느낄 수 있는 강렬한, 행복은 신기하게도 몽땅 없어졌다. 그 대신 목이 마를 때 언제든지 마실 수 있는 적당히 시원한 물이 언제든지 손 뻗는 곳에 있구나, 하는 잔잔한 안도와 즐거움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없어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의 마지막에 얻은 것도 하나 적어야겠다.

그것은 바로 '봄'이다.

"요즘 한국은 4계절이 아니야. 계절이 두 개인 것 같아. 봄, 가을 없이 여름, 겨울만 느껴져."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이미 봄은 저만치 지나가 있었고, 금방 더워졌다.
백수가 되어 4월 중순에 한국에 도착한 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가장 자주 느낀 것이 있다.  
'아- 봄이다. 봄 공기, 봄바람, 봄 냄새, 꽃, 연두색 풀잎들, 새싹....  봄이 내 옆에 있구나. 사실 빨리 지나가는 게 아니었구나. 단지 내가 잘 느끼지 못했던 것이구나.' 정말 봄은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봄은 매일 조금씩 익어갔고,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온전한 봄이었다.


/

잃고 얻는 것이 아주 분명했던 6개월 반의 시간 부자로 보낸 생활.

일주일 전 다시 직장인이 되었지만, 이것들을 꼭 기억하고 싶어서 길게 적어보았다. 확실히 일주일 만에 커피도 조금씩 다시 마시게 되고, 어깨도 다시 아픈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주말이나 공휴일만 내 일상이 아니라 일하는 시간, 회사에 가는 대중교통 안에서의 시간도 다 내 일상인 것을.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하되, 나를 더 아끼며 주어진 일상을 소중히 다루고 지켜보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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