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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27. 2022

[꼭 뭐가 되어야 할까?] #2

오십에도 장래희망은 있다

2~3년쯤 전 일이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조카가 장래희망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조카의 최대 고민은 장래희망이 너무 많아 딱 한 가지를 결정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열두 살은 원래 그런 나이니까!


“이모도 너만 할 때는 그랬어. 슈바이처 박사처럼 인류에 봉사하는 의사도 되고 싶었고, 피겨스케이팅 선수도 되고 싶었고, 참! 탭댄스나 상모 돌리기를 멋지게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지! 그런데 이제 이모는 장래희망이 귀여운 할머니야!”


불혹(不惑)이라던 마흔이 되었건만 여전히 미혹(迷惑)하기만 한 줏대 없는 내 마음을 다스려볼 요량으로 세월을 미리 훅훅 돌려 정한 10년 전 내 장래희망이 바로 ‘귀여운 할머니’였던 것이다. 글쎄,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라는 제목의 사진 에세이가 발간된 것으로 보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 있기는 한 모양이다. 하지만 맹세코, 적어도 그 책보다는 10년 전이었던 내 장래희망이 먼저다.


그런데 내 장래희망을 들은 조카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고 둥그렇게 뜨더니 말했다.


“이모는 지금이잖아요! 지금이 이미 장래인 거 아니에요?”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의 말뜻을 몰라 한동안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내가 먼저 아이의 의중을 파악했고, 참을 수 없는 웃음보가 터졌다.


암, 그렇지! 열두 살은 그런 나이지! 오십을 바라보는 아줌마한테도 장래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절대 할 수 없는 나이고 말고! 이모도 너만 할 때는 그랬단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이 오십에도 장래희망은 있단다.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깔깔 웃기만 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열두 살에게 한참 만에야 나는 말했다.


“이모한테도 내일은 오잖아. 내일은 적어도 오늘보다는 장래잖아. 그렇지?”

그제야 아이는 말도 안 된다며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유~ 그래도 이모는 아직 할머니 되려면 멀었잖아요.”

이런 귀여운 동문서답을 보았나!


나를 꼭 빼닮은 조카에게도 미처 공감받지 못했던 내 장래희망은 아직 유효하다. 심지어 10여 년 전 막 마흔이 되었을 때는 조카 말처럼 아직 멀게만 느껴졌던 할머니가 그리 멀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장래희망은 이미 현재 진행형이 되었다.

그래서 ‘귀여운 할머니’가 되기 위한 몇 가지 원칙까지 나름대로 정해 두었다.


첫째, 나이는 벼슬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이를 이유로 특별히 대우받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둘째, 나이는 면죄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일상의 나태가 정당화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셋째, 나이는 지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이 든 내 생각이 옳을 것이라는 착각은 절대 금물이다.

마지막으로, 나이는 망각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이 들었다고 부끄러움마저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네 가지 원칙 중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끄러움이다. 나이 들었다고 특별한 대우를 받으려 드는 것도, 나이를 이유로 한없이 나태해지는 것도, 그리고 나이 든 내 생각이 언제나 옳다고 고집 피우는 것도 다 부끄러움을 몰라서 생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에게 있어 귀여움은 곧 부끄러움인 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조금씩 주책스러워지는 것도 어쩌면 인지상정이다. 순발력도 떨어지고, 그만큼 판단의 속도도 느려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 또한 주책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책을 이내 부끄럽게 여길 줄 안다면 이는 귀여움으로 승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커피도 내리고, 글도 쓰며 어느새 슬슬 할머니를 향해 가고 있으니, 이제 귀엽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다시뉴스 필진 정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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