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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27. 2022

[크크의 다시 읽기] #4

삶을 돌보는 감각을 위하여

발칙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몇 년 전,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추석이란 무엇인가” 물으라던 칼럼이 회자됐었다. 당숙이 언제 취직할 거냐고 묻거든 “당숙이란 무엇인가”, 얘가 미쳤냐고 버럭 하거든 “제정신이란 무엇인가”, 가족끼리 이런 얘기도 못하냐고 따지거든 “가족이란 무엇인가”로 대꾸하라고 조근조근 일러주던 저자는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였다. 그것도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를 전공해, 논어를 외우고 유교 사상을 공부하는 학자란다. 외모마저 얌전한 천상 백면서생인데 어디서 이런 삐딱함이 나올까.


<공부란 무엇인가>는 그 ‘발칙한’ 교수가 질문을 던지는데 끝나지 않고 그의 전공이자 직업인 '공부'를 선택해 정체성을 밝혀준 산문집이다. ‘발칙이라니?’ 저자가 타박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저자 : 내가 발칙하다고요? 발칙하다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가요?

크크 : (엥?) 글쎄 당돌, 당참이랑 비슷한 건데요. 그게...

저자 : 하는 짓이나 말이 매우 버릇없고 막되어 괘씸하다! 그런 개념인가요?

크크 : 아니 그건 사전적 의미이고 제 뜻은 긍정적이죠. 그런 사회의 평가에 반해 저의 개인적 지지를 표현하는 뭐 그런 개념이지요. 다들 알아듣는데 뭘 거창하게 개념 정의까지 필요하죠?

저자 : 모호하게 말하는 건 권력자의 무기예요. 혼자만의 생각으로 언설하면 안 됩니다. 사회적 함의를 고려해야 하지요.

크크 : 정치적인 얘기도 아니고 개인 취향인데 맘대로 말도 못 해요?

저자 : 발칙한 사람을 좋아한다면서 이런 반문 하나도 수용하기가 어려운가요? 스스로 모순 아닌가요? 적어도 모순 없게 얘기해야 하는 겁니다.


저자가 1부에서 소개한 공부의 길이란 명료한 개념 정의를 고려하고 모순이 없는지 성찰하며, 단어의 사회적 함의를 고려하는 일이다. 그러니 명확한 뜻도 모른 채 발칙 운운하고, 질문조차 참지 못하며 좌충우돌하는, 자칭 팬을 만났다면 저자는 도대체 책을 읽기는 한 거냐고 타박했을지도 모르겠다. 

2부 ‘공부하는 삶’에서 저자는 깐깐한 공부의 길을 걸어서 어디쯤에 당도하는지 이야기한다.


“호기심에서 출발한 지식 탐구를 통해 어제의 나보다 나아진 나를 체험할 것을 기대한다. 공부를 통해 무지했던 과거의 나로부터 도망치는 재미를 기대한다. 남보다 나아지는 것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어차피 남이지 않은가. 자기 갱신의 체험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보고 있다는 감각을 주고, 그 감각을 익힌 사람은 예속된 삶을 거부한다.” (72쪽)


공부는 정신의 척추기립근을 세워주고, 그 근육은 자신의 삶을 돌보는 감각을 준단다. 하루하루 자기 갱신의 체험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3부 ‘공부의 기초’, 4부 ‘공부의 심화’ 편에서는 독서하는 법, 토론하는 법, 세미나 하는 법, 연구자의 윤리까지 상세히 설명하며, 공부란 혼자 하는 게 아니라고 역설한다. 마지막 5부는 공부에 대해 나눈 대화를 실었다. 결국 이 책을 정리하자면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공부를 하면 어떤 삶이 되는지를 설파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발칙한 질문과 문체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낸 저자의 공부하는 자세는 오로지 투철함이다. 한 가지도 대충 넘기지 않는 투철함, 목표를 향해 직진하는 투철함, 방해되는 것들을 직면하는 투철함들이 책 가득 담겨 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가 공부에 대한 찬양에서 벗어난 적이 있을까? 공부하라는 잔소리 듣기가 지겨웠건만 나도 자식들에게 여러 이유를 들어 공부하라는 압박을 했었다. 그 긴 시간 공부, 공부하며 살았건만 저자가 말하듯 내 삶은 생생하며 자유로웠던가.


공부(工夫)의 정의를 찾으니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지식이나 기술을 완성시키는 과정 혹은 결과라고 한다. 유교에서 나온 말 같지만 실은 당나라 선승들이 불법을 열심히 닦는다는 뜻으로 쓰며 전파되었단다.


직장생활 25년 동안 한 가지 계통의 업무에 복무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지식과 기술을 완성시키는 것이 공부라면 나도 못지않은 시간과 노력을 다했다. 긴 시간 동안 이 일을 좀 더 잘할 수 없을까 탐구했고, 새로운 변화가 생기면 관련 서적과 논문을 찾아 읽으며 본질을 파악하려고 했고, 그에 따라 업무의 틀과 프로세스를 다시 짰다. 일중독자 소리를 들을 만큼 목표 달성을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종종 한계에 도달해 극심한 두통과 위통을 겪었고, 스트레스로 입을 벌릴 수 없을 만큼 이가 시리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일하는 동안에는 늘 미진함에 괴로웠고, 직장생활을 그만둔 후에는 공허함에 시달렸다. 익숙한 공부에서 다시 시작한다면 무언가 답이 있을까 기대하는 마음에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저자의 공부하는 삶과 나의 일하는 삶은 무엇이 달랐던 걸까’ 질문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질문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앞으로 내게 남겨진 유한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하는 탐색의 길에 하나의 선택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 발칙하게 공부하는 삶.


다시뉴스 필진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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