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시 뉴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Apr 02. 2022

[84세로 말할 것 같으면] #1

세상에 이런 일이

목요일 오전이면 나는 글쓰기 모임에 나가느라고 늑장 부리는 92세 남편의 아침밥을 차려주고 부리나케 외출을 서두른다. 어김없이 일주일에 한 번, 가끔 바쁘다는 핑계로 빼먹기도 하지만, 내게는 이 외출이 유일한 외부 행사다. 코로나 기간 중에도 절필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모이려고 애쓰는 문우들과 수다를 떨며 점심까지 먹고 헤어지면 어느새 남편의 저녁을 차려낼 시간이다.


나는 곧장 백화점으로 들어간다. 모임 장소가 그 근처라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주차비 내며 백화점을 이용하는 탓이다. 가끔 대중교통을 이용할 생각도 하는데 버스의 문턱이 높아서 올라설 것 같지가 않아 망설이다가 결국 자가용을 몰고 나온다. 84세여도 나는 무사고 베스트 드라이버다.


길만 막히지 않으면 내가 사는 곳에서 모임 장소까지는 차로 고작 5분 거리. 오전의 백화점 주차장은 한적해서 차를 대놓고 모임을 다 마치고 돌아와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하 식품부에서 장을 보면 주차비는 공짜이다. 시간이 넉넉하면 공연히 위아래로 쏘다니며 아이쇼핑이란 미명 하에 이것저것 살 것처럼 만져 보다가 돌아서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가끔 불필요한 옷을 사기도 한다. 가성비로 따지자면 산수가 안 맞는데 왜 내가 주차비에 연연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사촌이 땅을 산 것도 아닌데 주차비를 내려고 하면 무지 배가 아프다.


어쨌든 일단 지하 식품부에 들어서면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동네의 단골 슈퍼마켓은 자그마한 공간에 엄선한 자재를 알맞게 진열해 놓고 있어서 고민 없이 적당히 주워 담으면 그만인데, 백화점 식품관은 온갖 종류의 식자재가 넘쳐나서 그중에 뭘 선택해야 할지가 철저하게 구매자 소관이다. 그뿐인가? 그놈의 주차비를 안 내려면 적어도 매수액이 상당 액수가 돼야 한다. 그래서 두 노인의 배를 다 못 채워 곧 상할 재료는 조금만, 두고두고 쓸 것은 많이, 매장 구석구석을 누비며 엄청나게 고민을 해야 한다.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계산대 앞에 줄을 선다. 앞사람이 계산하는 동안 나는 숄더백 속에 넣었던 핸드백을 꺼내서 지퍼도 미리 열어 놓고, 포인트 적립을 위해 핸드폰도 꺼내 든다. 쇼핑카트에 물건을 주섬주섬 꺼내놓고, 빈 카트는 기둥 옆에 밀어붙이고, 계산하고, 비닐 백에 도로 물건 주워 담고, 그러고 나서 양쪽 손으로 비닐봉지를 대신해서 산 종량제 봉투를 번쩍 들어 올리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띵 하고 울린다. 사달이 난 것이다.


‘어디 갔지?’ 숄더백이 안 보인다. 기둥에 밀어붙인 카트 속에 있나 하고 뒤돌아 보니, 어느새 누가 치웠는지 이미 그곳에 없다.


"여기요, 여기요!" 다급하게 직원으로 보이는 청년을 불러 세운다.

"여기 놔둔 카트 어디 갔어요?"

"왜 그러십니까?" 나는 마음이 급하니 말보다 손짓이 먼저 나온다.

"흰색에 줄무늬 있는 백을 카트에 놨었는데 없어졌어요!"


청년이 침착하게 구석진 곳을 가리킨다. 빈 카트를 모아 놓는 곳이다. 그리로 달려가며 나는 잠깐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분명히 카트를 발로 밀어붙일 때, 그 안에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나 자신을 믿지 못한다. 결국 남들이 밀고 다니는 카트까지 눈으로 쫓아다니며 허둥댄다. 혹여 잃어버렸다 해도 그다지 아까울 것 없는 낡은 물건인데 공연히 수선을 부리나 싶기도 하다.


그 안에 중요한 것이 있을 리 없다. 글 모임에서 나눠준 인쇄물이 한 부, 그리고 맞춤 돋보기를 내가 거기 넣었나? 혹시나 해서 나는 손에 쥐고 있는 핸드백 속을 들여다본다. 안경이 검은색 비닐집에 얌전히 들어 있다. 그러면 차 열쇠는 어디 있지? 없는 거 확인하고도 구석구석 괜히 몇 번이고 손으로 더듬어본다.

'이런! 숄더백에 넣었잖아!’ 정신이 반쯤 나가고 머릿속이 하얘진다.


다시 지나가는 애꿎은 직원을 불러 세워놓고 차 열쇠까지 잃어버렸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발을 동동 구른다. 예의가 깍듯한 직원이 바로 찾아보겠다며 사라진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통로를 벗어나 구석진 곳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이라는 것을 해본다. ‘며느리한테 보조키를 갖다 달라고 전화를 해야 하나? 아니면 방송실을 찾아가 볼까? 어쩌면 공항처럼 분실물 보관소가 있을지도 모르지.’


천천히 숨을 고르며 거추장스럽게 들고 있던 물건들을 쇼핑카트에 일단 하나씩 내려놓는다. 식료품이  비닐  2, 핸드폰과 돋보기가  까만 핸드백, 목을 칭칭 감고 있는 머플러, 눈꺼풀까지 내리 덮인 비니, 과도하게 남아돌아 눈을 찔러대고, 시야까지 방해하는 대짜 마스크. 나는 살그머니 마스크를 벗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애드벌룬처럼 부풀어 오른 오리털 외투를 벗는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잃어버렸다던 숄더백이 내 팔꿈치에서 스르르 발등으로 떨어져 내린다. 순간 앞이 깜깜해진다. 그러니까 간단히 정리하면, 숄더백에서 핸드백을 꺼낼 때, 그 숄더백이 내 팔꿈치로 스스로 가서 걸렸다는 거네! 천천히 허리를 구부려 숄더백을 집어 들며, 차라리 ‘잃어버렸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니까 흉이랄 것도 없다. 하지만 숄더백을 팔에 걸고 허둥지둥 찾아 헤매는 정신 나간 할머니는 누가 봐도 참혹하다.


다들 나이를 먹는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만큼 늙는 게 나쁘지는 않다. 후각을 잃고, 청력이 떨어지고, 시력이 약해져도 그건 그런대로 주위가 조용해지는 새로운 경험이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나무늘보처럼 느리게 산다. 제법 괜찮은 노인만의 세상이다.


그런데 이 놈의 백화점 식품부에서 10분 동안 공연히 전쟁을 치르고 나자 나이 드는 게 문득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온전하다는 확신이 서질 않아서다. 조만간 남편을 보고 "댁은 뉘슈?" 하면 어쩌지? 그러면 그건 또 그것대로 괜찮으려나? 절로 웃음이 난다.


다시뉴스 필진 윤명숙


매거진의 이전글 [꼭 뭐가 되어야 할까?] #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