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주양육자가 1명이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동네가, 마을이, 학교가, 친척이 함께 키웠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태어날 때 다 지 밥그릇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주양육자 1명이 오롯이 도맡아서 키운다. 주로 엄마가, 혼자 키운다. 그마저 여력이 안 되면 친정 엄마찬스를 쓴다. 그도 여의치 않으면 별 수 없다 전업맘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만일 육아하는 비용과 자신이 벌어들일 수 있는 비용을 비교하여 도우미를 쓰면 더 이득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면 비용을 따로 들인다. 물론 친정부모의 손길을 빌려도 그에 맞는 적정한 비용은 지불해야 한다.
전업맘이 되면 내 아이만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리라 다짐한다. 그래서 남의 아이와 같이 있을 때, 나의 아이가 1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정작 아이는 어느 순간 나에게는 관심없는 순간이 온다. 분명이 같은 공간에 있는데 말이다. 아이가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때가 온다. 빠르면 18개월, 늦으면 24개월즈음에 시작된다.
어느 날, 놀이터에서 아이와 함께 놀게 되었다. 나는 내 아이만 본다. 그리고 놀아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른 아이와 함께 놀게 해 주려고 다른 아이가 우리 아이에게 접근하면 나는 같이 놀게 해주려고 그 아이와 함께 놀아준다. 하지만 사회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아니면 같이 놀기 어렵다. 특히 36개월 미만인 경우는 특히 그렇다. 남아라면 더더욱 그렇다. 같이 있어봐야 놀이감가지고, 놀이기구가지고 싸울 뿐이다.
결국, 내 아이는 저리 가버리고, 놀아주기 시작한 그 아이와 놀아주게 된다. 그런데 내 아이는 저쪽 멀리 다른 걸 놀이하고 있다. 놀이하기 시작한 아이를 내버려두골 내 아이를 쫒아갈까? 그러면 나랑 놀이하던 이 아아는 어떡하나. 그 아이의 보호자가 엄마가 아닌 도우미거나, 다른 사람이면 아이와 적극적으로 붙어있지 않다. 요즘 엄마들은 '내아이'만 붙어다니니까 말이다.
그래서 내 아이는 냅두고 남의 아이와 같이 놀아주는 것이 불편했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관심없어하고 다른 데 가는 내 아이가 엄마 없이도 잘 노는 줄 알았다.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씩씩해보여 안심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이는 나와의 안정애착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자신의 외부에 탐색하러 나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아직은 친구와의 사회성이 발달하기 전이지만, 자신과 엄마이외에 마음껏 탐색하러 나갔던 것이었다.
36개월까지는 엄마와 함께 있다는 것이 좋다고 해서 딱 36개월 째 어린이집을 보냈다. 아이는 6개월 동안 어린이집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1학기만 마치고 다른 가정어린이집으로 옮겼다.
생후 1개월까지는 생모가 누군지, 아직 애착을 형성하지 못하고 거의 본능으로만 생활한다. 그렇기에 산모가 1개월까지는 몸조리에 힘쓸 수 있다. 아기 입장에서는 잘 먹여주고 재워주면 장땡이니까, 보호자가 누구든 상관은 없다.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서 점점 바깥세상에 탐색하기를 원하지만, 옆에 '엄마' 또는 '주양육자'가 옆에서 안전기지 역할을 하면 꼭 옆에 붙어있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걸 몰랐다. 전업맘은 아이에게 계속 놀아줘야 하고 상호작용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옆에 자신을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상호작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커갈수록 아이의 뒷모습을 계속 지켜보아주어야한다는 말이 있나보다.
그래서 내가 남의 아이와 놀아준다고 해서 내 아이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아이의 사회성을 기르고 싶었다면, 내가 다른 아이와 노는 것을 보고 어떻게 노는지 충분히 배웠을 것이다. 단지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우리 아이를 방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게 중요한 것이었다.
내가 그런 미안함을 갖는 순간, 아이는 오히려 내 옆에 있어서 세상을 탐험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아이가 세상에 나갈 수 있도록 든든한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탐험하다 다쳐 돌아오면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고, 치료해주어 다시 세상에 도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진정한 역할인 것 같다.
예전에는 '같이' 키웠다. 요즘은 '혼자' 키운다. 그래서 너무 힘들다. 내가 남의 아이를 봐주면, 남도 내 아이를 봐줬다. 그때처럼 키우자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고 내 아이에게만 딱 달라붙어서 '내아이'만 챙기고, 남의 아이 봐줬다고 내아이에게 미안함을 느끼지는 말자. 옛날같이 육아가 돌고 도는 건 아니지만, 내 아이는 엄마가 하는 '따뜻한 마음'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