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6화.
저녁 8시.
오전 조의 다음날 출근을 위해서 생일파티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시작했다. 마감 조는 2차에서 뭉치기로 했다. 이날 생일 파티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평소 붙임성이 좋은 연희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식음료 직원들 이외에 프런트 데스크 직원들과 주방식구들까지 모두 모였다. 성진은 이미 아내에게 음성 메시지로 전체 회식이 있어서 늦게 들어갈 것 같다고 알렸고, 예상과는 다르게 무심한 듯 흔쾌히 허락했다. 성진도 모처럼 정정당당하게 얻은 자유시간으로 인해서 마음이 가벼웠다. 모두가 어울려서 즐기는 이번 파티는 조그만 호텔이었기에 서로 다른 부서라는 이질감보다는, 오히려 끈끈한 동료애가 넘치는 분위기였다. 시간이 지나자 그중에서도 조금 더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진지한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연이은 농담으로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의자 뒤로 넘어질 듯 자지러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늘 어느 자리에서나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는 법. 그 희생양이 하필이면 생일 주인공인 연희였다. 어느 정도 호텔 경력도 있고 항상 거친 언행으로 본인 나름대로 남자다움을 과시했던 주방팀 남자직원인 김 대리가, 연희의 곁으로 다가가 앉은 순간부터 분위기는 뒤집어졌다. 연희는 불쾌한 내색을 우회적으로 표시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 지켜보던 성진이 참다못해 말리기 위해서 연희의 곁에 앉은 것이 김 대리의 심기를 건드린 꼴이 되었다.
“좀 취한 것 같은데 그만하시죠.”
김 대리는 굳은 표정으로 성진에게 거칠게 반응했다.
“아. 지배인님? 그런데 여긴 바깥인데, 어쩌라고.. 여기도 지배인 행세하시려고? 좀 비키지?”
“말이 좀 지나치시네요. 오늘은 그만 드시고 다음에 한잔 합시다.”
“아니 내가 당신한테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고! 여기 새로 오신 이쁜 언니랑 얘기 좀 한다는데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야?”
중간에서 난감한 상황에 처한 연희가 일어나려 하자, 김 대리가 연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에이 그러지 말고, 나랑 한잔해요. 여기 말고 내가 분위기 죽이는 데를 알거든. 거기로 갑시다!”
“이 손 놓으세요! 아파요..”
연희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주방에서 일하며 다져진 김 대리의 굵은 팔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돌발 상황이 벌어지자 다른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있을 때 성진이 다시 나섰다.
“그만하라고!”
성진이 강제로 김 대리의 손을 떼어놓자, 김 대리가 뒤로 자빠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김 대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이 자식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결국 주먹다짐이 일어날 일촉즉발의 순간에, 지금까지 지켜만 보던 진경이 두 사람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만! 대리님 여기까지만 하지. 안 그러면 우리 오빠 올 시간됐는데 한번 붙어볼래?”
진경의 남자친구가 운동을 했던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이미 호텔 전체에 널리 소문이 났기 때문에 진경은 이를 이용하려 했다.
“넌 또 뭐야!”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김 대리의 손이 진경의 얼굴로 향했다.
‘퍽!’
김 대리의 주먹을 맞고 쓰러진 것은 성진이었다. 연희가 놀라서 성진에게로 다가가자 김 대리가 다시 손을 들었다.
‘짝!’
갑자기 어디선가 날라 온 뺨을 맞고 자빠진 사람은 김 대리였다.
“미안합니다. 우리 식구들이 무례하게 굴었네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주방장이었다. 주방장이 나서서 일촉즉발이었던 상황이 금방 마무리되었다. 뺨을 맞은 김 대리는 갑자기 술이 깨버렸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방장과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주방식구들 모두 일어나! 저희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지배인님 미안합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살펴가세요. 부장님.”
주방장에게 거의 끌려 나가다시피 한 김 대리와 주방식구들은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목례를 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남아있던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희와 성진을 바라보았다.
“연희 씨 괜찮아요?”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지배인님이..”
성진의 입술이 터져서 입가에 피가 묻어있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진경이 분위기를 다시 띄워보려 애썼다.
“자자. 이제 우리 멋쟁이 오라버니 덕에 진상은 처리되었고, 다시 시작해야지 안 그래? 오케이?”
모두들 진경이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잔에 술을 채우고,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희는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해서 더 이상 자리에 있기가 힘들었다.
“저.. 진경아 나 먼저 일어날게.”
“왜 언니? 불편해서 그래?”
“아니. 술도 많이 마신 것 같고, 또 늦은 것 같아서.”
“에이.. 그래도 주인공이 먼저 가면 재미없는데.”
“미안해. 화장실 간다고 하고 몰래 갈 테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고.”
“차도 없으면서 이 밤에 혼자 어떻게 가려고? 그럼 나랑 같이 가자 언니.”
“괜찮아.”
“아니야 어차피 나도 오빠가 못 올 거 같아. 아까는 둘러대느라 뻥을 친 거였거든. 둘이 몰래 도망치자고. 같이 나가면 눈치채니까 내가 먼저 나간 다음 언니는 조금 있다가 나와.”
진경이 눈을 찡긋하고는 사람들에게 화장실 간다고 둘러댄 후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연희가 계단으로 올라가려 할 때, 술기운 때문인지 어지러워서 계단을 헛디디고 비틀거리자 성진이 연희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 팔을 잡아요.”
“고마워요. 지배인님.”
“아까 진경이랑 몰래 얘기한 거 봤어요. 그래도 둘이 가니까 제가 마음이 놓이네요.”
“눈치채셨구나. 미안해요 먼저 가서.”
“괜찮아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니까, 자 올라갑시다.”
두 사람이 주점 계단을 올라오니 이미 진경이 택시를 잡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어. 오라버니가 웬일이야?”
“내가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는데 부축해 주셨어.”
“역시 우리 지배인님이 짱 이라니까. 어 저기 택시 온다. 오라버니 우리 먼저 가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 두 사람 도착하면 삐삐 쳐라 걱정되니까.”
“오케이. 알겠어요.”
잠시 후, 그나마 술을 덜 마신 진경이 길안내를 위해서 택시앞자리에 탔고, 성진이 뒷문을 열어서 연희를 태웠다. 그러고는 문을 닫으려 했는데 문이 닫히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성진이 아래쪽을 바라보자 연희의 발이 문 사이에 끼어있었다. 성진이 발을 빼보려고 애를 써도 잘 빠지지가 않자 연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엇인가 말을 하는 듯 성진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성진이 같이 타기를 바라고 문이 닫히지 않게 막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진경아 내가 두 사람 집 앞까지 바래다줄게. 그래야 마음이 놓이겠다.”
그제야 연희의 발이 문틈에서 빠지고 성진은 그녀의 옆에 같이 타게 되었다.
“뭐야, 오빠. 이런 서비스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감격인걸.”
“됐어! 인마 평소에 말이나 잘 들어.”
성진은 진경에게 자신이 같이 타고 가는 이유에 대해서 얼버무린 뒤, 고개를 돌려 의아스러운 눈으로 연희를 바라보자 연희는 성진을 바라보며 쑥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후, 택시가 진경의 집 앞에 도착했다.
“오라버니 나 먼저 갈게요. 연희언니 잘 바래다주고, 내일 봐. 고마워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
“진경아 내일 봐.”
“응 언니 조심히 가요,”
택시가 다시 출발하고 십 여분쯤 지나자 연희가 가리키는 골목에서 택시가 멈췄다.
“기사님. 여기 한 사람 더 내릴게요.”
이때, 연희가 성진의 손을 잡으며 말렸다.
“아니요. 그냥 같이 내릴게요. 얼마예요?”
성진은 술 취해서 비틀거리던 그녀가 말을 또박또박하게 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같이 내린다는 말에 더 놀랐다.
“지배인님 저랑 같이 내려요. 지배인님한테 할 말이 있어요.”
“....”
택시에서 내리자 연희가 건너편 편의점의 간판을 가리켰다.
“여긴 외진 곳이라 가게들이 모두 일찍 닫아요. 맥주나 좀 사러 가요.”
“연희 씨. 할 말이 뭔데요?”
“일단 맥주부터 산 다음에 가서 얘기해요.”
“가다니요? 편의점 앞에서 안 먹고?”
“우리 집에 가요.”
“네에? 그건 좀 그런데요.”
“왜요? 제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요? 호호, 걱정 마세요. 저랑 같이 사는 언니가 있는데 괜찮죠? 그 언니도 다른 호텔에 캐쉬어로 일하거든요. 마감조라 조금 전에 들어와서 아직 안 잘 거 에요.”
“그래도, 두 분이 살아도 그렇지 어떻게 여자들이 사는 집을 제가...”
“에이.. 지배인님 꽉 막히신 분이네. 괜찮다니까요. 여기까지 오셔서 그냥 가시는 건 너무 서운한데요.”
성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녀의 할 말이라는 것이 궁금했다.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먹을 캔 맥주와 안주거리들을 샀다. 연희가 성진의 손목까지 잡고서 앞장서는 터라서 끌려가듯 그녀를 따라갔다. 연희가 사는 곳은 낮은 언덕에 위치한 단독주택 밀집지역으로, 달동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사이로 좁은 골목길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다. 성진은 연희를 쫓아가며 가로등조차 없는 어두운 골목을 지날 때면 늦은 시간에 혼자 다니는 그녀가 걱정됐다.
“퇴근 때마다 이렇게 어두운 곳을 혼자 다니면 무섭지 않아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중심가는 월세가 비싸고 돈에 맞춰서 오다 보니 이곳에 오게 됐지만, 생각보다 괜찮아요. 다행히 주변에 술집이 많지 않아서 이상한 사람들은 안 보여요. 모두 주택가라서요.”
“그래도 무서울 것 같은데..”
“걱정되세요? 그럼 매일 지배인님이 바래다주실래요?”
“네?”
“호호호. 농담이에요.”
“아.. 하하.”
“다 왔어요. 저기 위에 불빛 보이죠? 저기예요.”
연희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한 단독주택 맨 위에 있는 옥탑 방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그곳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군데군데 녹이 쓴 초록색 철문을 지나야 했다.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옥탑으로 올라가는 철제계단이 눈이 들어왔고, 꽤나 가파르다고 생각할 때 그녀가 성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지배인님. 아까 주점에서 부축해 주신 것처럼 좀 잡아주세요. 발이 접질렸는지 아직 조금 시큰 거리네요. 업어주시면 더 좋고요. “
부담되긴 했지만 성진도 내심 그런 애교를 부리는 그녀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럼, 이거 들어봐요.”
성진이 내민 맥주와 안주가 담긴 비닐봉지를 연희가 받아 들자, 성진이 등을 돌린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업혀요.”
“와 정말 업어주시는 거예요?”
“어서요. 마음 변하기 전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성진의 등을 끌어안고 비닐봉지를 든 양손을 목에 감았다. 다행히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지만, 계단이 가팔랐기에 다소 버거웠다. 그때 성진의 얼굴 앞으로 머리를 기댄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더니 향수인지 화장품 냄새인지 모를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
“고마워요 지배인님.”
그녀의 목소리가 귓속말을 하듯이 가까이 들렸다. 순간 성진은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한동안 잊고 살아온 그리고, 그토록 그리웠던 그 느낌이 온몸에 전기가 통하듯 다시 꿈틀거림을 느꼈다. 그 덕분인지 성진은 나머지 계단을 힘들다는 느낌 없이 임무를 완수했다. 계단을 올라오자 평소에 계단 오르는 소리가 다르다고 생각한 옥탑방의 또 다른 주인이 놀란 듯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언니 나야!”
방에서 나온 여자가 연희의 옆에 서있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얼굴에 붙어있던 마스크 팩을 급하게 떼어냈다.
“어, 그래 그런데 옆에 누구..?”
“아 우리 지배인님. 인사하세요. 이쪽은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언니예요.”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박 성진이라고 합니다.”
“아네. 안녕하세요. 이 시영입니다. 얘는 음성이라도 남기지 나 맨얼굴인데.”
갑작스러운 남자의 방문에 여자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괜찮아 언니, 언니는 기본이 있으니까. 호호.”
“얘는 무슨.. 좀 좁지만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날 세 사람은 맥주를 마시며 호텔에서 근무하는 동안 겪은 에피소드와, 각자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했다. 성진은 대화도중 미소 짓는 연희와 간간이 눈이 마주칠 때면 야릇한 이상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쨌든, 성진에게 이 시간 동안만큼은 모처럼 걱정을 잊은 채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