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5화.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 연희 씨 댁이죠?”
“네. 그런데 어디신가요?”
“어제 면접 보신 릴리트 호텔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네. 면접에 통과되셔서 연락드렸습니다. 내일부터 출근 가능하신가요?”
“네. 가능합니다.”
“그럼, 내일 오전 8시 30분까지 2층 레스토랑 면접 보신 장소로 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혹시 준비할 것이 있을까요?”
“반명함 사진 2매 하고, 등본 두 통 그리고, 보건증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네. 내일 봬요.”
통화하는 내용을 듣고 있던 진이가,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지배인님. 그 언니 된 거예요?”
“응. 총지배인님이 채용하라 하시네.”
“와. 그럼 홀에 식구 늘어나서 널널 하겠네.”
“뭐가? 단체예약 오고 비번 날 사람 빠지면 택도 없다. 지금까지 애들이 잘 버틴 거지.”
“에이.. 우리 캐쉬어들도 도와 드렸잖아 요.”
“그래. 맞다 맞아. 하하, 생색은..”
“근데 그 언니 결혼은 했데요?”
“아참 그걸 안 물어봤네. 곧 알게 되겠지.”
“그거 중요하잖아요. 비번을 짤 데도 그렇고, 혹시 애가 있거나 남편이 마감 조 못하게 하면 곤란하니까요. 저번에도 그거 모르고 채용했다가 남편이 난리 치는 통에 한 달도 못 버티고 그만뒀잖아요.”
“아.. 그러네. 이런 내 정신머리 하고는..”
“에이 지배인님도 이제 자리를 물려줄 때가 되셨나 보네.”
“뭐라고? 이 녀석이..”
“헤 헤.”
“나 잠깐 담배 한 대 피우고 올 테니까. 자리 잘 지키고 있어.”
“칫.. 알았어요.”
성진은 삐삐에 음성메시지가 온 것을 확인하러 밖으로 나왔다. 음성에는 아내가 동창생들 모임이 있어서 늦게 온다는 말이 녹음되어 있었다. 성진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은 못마땅하여 매번 지적하면서 자신의 일상은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아내가 못마땅했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로 진지하게 대화를 시도하려 하면 늘 싸움으로 이어졌다. 담배연기를 뱉어내자 힘없는 한숨이 묻어서 함께 흘러나왔다.
오후 퇴근시간.
성진은 오늘도 힘없는 발걸음으로 편의점에 들어갔다. 성진의 모습을 본 승대가 어서 오라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어.. 오늘도 한잔 생각나서 온 거야?”
“그래. 한잔 하자. 일찍 들어가 봐야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왜? 제수씨 어디 갔어?”
“동창회. 늦게 온데.”
“그런데 왜 풀이 죽어있어. 제수씨 없으면 밥도 못 챙겨 먹어서 그런 거야 아니면, 동창회도 못 가게 하는 의처증 환자야?”
“남의 속도 모르고 그런 말하지 마라. 술친구 할 거야 말 거야?”
“오늘 이상하게 신경질적 이네. 가자고 가.”
“어딜? 여기서 안 먹고?”
“내가 저번에 말한 순댓국집 가자고.”
“순댓국? 난 술 마실 때 밥은 안 먹는데 일단 가 보자.”
성진은 승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비워냈다. 그러고는 헤어질 때까지 가슴 한쪽이 뻥 뚫린 듯 허탈했다. 술을 마셔도 친구와 대화를 해 봐도, 모든 것이 무의미했고 공허하기만 했다. 여전히 힘없는 발걸음으로 집 앞에 다다를 때 즈음, 순댓국집에서 승대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너 말이야. 너무 제수씨에게 의존하는 거 아니야? 모든 걸 제수씨 기준에 맞춰서 사는 거 아니냐고. 넌 네 인생이 없는 거야?”
성진은 승대가 한 말을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가 집에 도착해서 공동대문을 열었다. 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아내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삐삐를 확인해 보았지만, 연애할 때 쓰던 그 흔한 단축번호는커녕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도 없었다. 성진은 신발과 옷을 벗고 씻을 때 까지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내가 들어오면 화를 내는 것이 맞는 건지, 모른 척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반갑게 맞아주는 게 맞는 건지,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 행동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의 거리에서, 자존감의 거리에서 길을 잃은 듯했다. 그렇게 많은 생각과 담배꽁초만 남긴 채 어느새 잠이 들었다. 얼마동안 잠들었을까 아내가 들어오는 소리조차 느낄 수 없었지만, 조심스럽게 방문이 열리고 옷을 벗고 씻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아무런 말도 몸짓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성진은 자신이 잠에서 깬 것을 들킬까 봐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잠을 재촉해도 오히려 정신이 맑아질 뿐 잠이 오지 않았다. 아내는 씻고 들어와서는 조용히 이불을 끌어안고 등을 돌린 채 누웠다. 성진은 애써 다시 잠에 들기 위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방안에 가득 찬 알코올 냄새가 성진의 코를 자극했고, 감긴 눈에는 눈물이 고이며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잠이 들었다.
다음날 오전.
연회실에는 신입사원을 맞이하기 위해서 직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성진이 신입사원을 소개하기 위해서 연희의 옆에 서 있었다.
“자 여기는 이번에 우리 식음료부에 새로 입사한 이 연희 씨입니다. 모두 박수로 맞이해 줍시다.”
모두들 큰 박수로 환영해 주었고, 연희는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연희 씨,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반갑습니다. 이 연희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새 식구도 들어왔으니 여러분들이 많이 도와주고, 잘 챙겨주세요. 연희 씨는 일하다가 모르는 게 있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오 영진 캡틴에게 물어보세요.”
“네..”
“그럼 캡틴이 오늘과 내일은 연희 씨랑 같이 다니면서 일하기 전에 외워야 하는 것부터 알려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한 달 뒤.
연희가 릴리트 호텔에 들어온 이후, 모든 일상은 항상 그렇듯이 별 새로울 것 없는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일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일지 몰라도, 적어도 성진에게만은 답답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부부싸움이 없었다는 것이 유일한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부부의 사이가 가까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제는 레스토랑의 커다란 창가 앞에 서있으면, 제법 따가운 햇살 때문에 오래 있지 못하는 계절이 왔다. 성진이 고블렛에 얼음을 가득 담은 냉 녹차를 들고 창가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평소에 지겨울 만큼 들었던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연주가 아닌 생소한 음악이 레스토랑에 울려 퍼졌다.
성진이 고개를 돌려 오디오 데크 쪽을 바라보니 연희가 오디오 데크 앞에 서 있었다.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그녀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성진에게로 다가왔다.
“연희 씨, 거기 있는 테이프 함부로 막 만지면 안 돼요.”
“아, 죄송해요. 매일 너무 같은 음악만 나오는 것 같아서요.”
“총지배인님이 워낙 까다로워서 본인 마음에 안 드는 음악을 틀면 난리를 치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 좋죠? 로버타 플랙이 부른 영화 삽입곡이에요.”
“음.. 나쁘진 않네요.”
“에이 좋다고 말해주면 안 돼요? 지배인님은 항상 분명한 게 없더라. 뜨뜻 미지 근 해.”
“하하. 내가 그런가?”
“그러면 안 돼요. 남자가 그러면 왠지 자신감 없어 보이거든요.”
“남자는 무슨.. 유부남인데. 유부남도 남자로 쳐 주나?”
“유부남도 남자죠.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하하.”
손님이 없는 여유로운 시간대에 레스토랑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자, 진경이가 다가와 쪽지와 볼펜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다짜고짜 질문을 했다.
“이보시오! 어서 돈을 내시오.”
성진이 놀라면서 되물었다.
“돈? 무슨 돈? 너 이젠 하다 하다 삥을 다 뜯고 다니냐?”
“에헤이. 이 아저씨가 삥 이라니! 정말 나한테 삥 한번 뜯겨 볼라우?”
“아, 그러니까 뭐냐구. 누구 생일이야?”
“응. 맞아! 생일. 생일 파뤼 해야지 않겠어? 오라버니.”
“하여튼 이것들은 틈만 나면 술 먹을 생각뿐이지. 그나저나 누구 생일인데?”
“옆에 있네! 생일 주인공.”
성진이 연희를 바라보자, 그녀가 부끄럽다는 듯 이 배시시 웃었다.
“아니. 이 언니보소.. 우리 오라버니한테 눈웃음을?”
“야, 뭐야.. 내가 언제.”
“내가 봤는데? 언니 큰일 나요. 우리 오라버니 유부남이야. 그런데 요즘 너무 외로워 보이니까 한번 도전해 보시던가.”
“얘는 무슨...”
“너 까불지 말고 니 자리로 안 가? 총지배인님 오시면 맥도 못 추는 게.”
“알았어. 알았다고! 돈이나 어서 내. 언니는 빼고..”
“얼마?”
“각 2만 원씩인데 지배인님은 특별히 3만 원. 헤헤.”
“야! 난 왜 3만 원이야?”
“아따 지배인님! 명색이 우리 캡짱 아니유. 그 정도는 내셔야지. 안 그러우? 언니.”
진경이 근엄하면서도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연희도 동시에 장난기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진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아이고 이런 날강도를 봤나. 자자.. 여기 가져가라.”
“오케바리! 땡큐베리 감솨! 오늘 저녁에는 모두들 약속잡지 말고 모이시길. 빠지는 사람들은 내가 가만 안 둬. 그럼 저는 이만.”
진경이 목적을 달성하고 신나서 깡충깡충 뛰며 카운터 데스크로 돌아가자, 연희가 재미있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