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싸라기 Oct 13. 2024

릴리트 호텔을 떠나며

4화

4화.

다음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동이 틀 무렵까지 먹고 마신 후유증에 대한 우려는, 그들이 예상한 대로 적중했다. 어느 누구랄 것도 없이 저마다 숙취로 두통을 호소하거나,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끙끙 앓아댔다. 그나마 오후에 출근하는 마감 조들은 조금 더 늦잠을 잘 수 있는 여유가 있었지만, 객실 손님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오픈 조는 두통을 호소할 시간조차 없었다. 입에서 술 냄새가 난다는 컴플레인이 총지배인 귀에 안 들어가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여직원들은 숙취로 인한 초췌한 모습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 열심히 화장을 고치거나 입 냄새를 없애려고 껌을 씹기도 하고, 남자 직원들은 냉수를 연거푸 들이켜거나 머리에 새집을 없애느라 분주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전날 술독에 빠진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다른 사람들은 눈치를 챈다는 사실을. 그런 우려가 현실이 되어서 머피의 법칙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총지배인이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서 이른 시간부터 레스토랑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다부진 체격에 굳게 다문 얇은 입술과, 은테안경 너머 보이는 듬성듬성한 눈썹아래의 날카로운 눈매는, 바라보는 직원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어디를 다니든 발걸음이 잘 들리지 않게 조용히 다녔기에, 직원들은 어디서나 행동하나 말 한마디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됐다. 성진은 이미 총지배인에 대한 경험이 많았기에 레스토랑 입구 주변에 방향제를 넉넉히 뿌렸다. 그러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총지배인이 신문을 다부지게 움켜쥔 채 레스토랑으로 들어왔다. 입구에 서있던 성진과 카운트 데스크에 있던 진이도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총지배인은 레스토랑 입구에 놓인 생화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홀 안에는 여전히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곡이 흐르고 있었고, 외국인 손님 몇몇이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아침식사로 즐기는 것들은 대부분 계란요리와 햄이나 베이컨, 그리고 약간의 과일 몇 조각과 음료가 곁들여진 아메리칸 블랙퍼스트라는 조식 세트메뉴 거나, 오믈렛 혹은 갈비탕 같은 한식 메뉴들이었다. 인기는 없지만 가끔 일본조식을 찾는 사람들도 드문드문 있었다. 총지배인은 성큼성큼 걸어가서 베버리지 바 앞에 있는 자신의 지정석에(대부분 손님들은 이곳 테이블이 베버리지 바에 가깝기 때문에 부담이 돼서 앉지 않는다) 앉아서 신문을 읽었다. 모든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들은 숨소리조차 죽여 가며, 되도록 총지배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스탠바이 하고 있었다. 직원들은 전날 마신 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총지배인 등장으로 긴장한 탓에 팔에 걸치고 있는 냅킨으로 연신 이마나 콧등 주변의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이때 성진이 당당하고 힘찬 발걸음으로 총지배인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러자 모든 직원들은 곁눈질로 성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아침식사 준비해 드릴까요?”

“음.. 크루아상 두 개랑, 내가 아까 주방으로 보낸 마가 있어. 그거 갈아와. 그리고 홍차 한잔 타오고.”

“네. 알겠습니다.”

성진은 빌지에 크루아상 두 개와 홍차 한잔을 적고 자신이 사인을 한 뒤, 한 장은 캐쉬어에게 전해주고 한 장은 주방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주방직원들은 식재료를 다듬고 준비하느라 아침부터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 전부 모여서 한잔 빨았다며?”

주방입구에서 목에 노란색 스카프를 동여맨 주방 여직원이 째려보며 말을 걸었다.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갔어?”

“여기가 어디야. 호텔이잖아.. 소문 금방 나지.”

“하여튼 사람들 입은 싸가지고...”

“그래, 날 안 부르고 모여서 노니까 재미있었나 봐?”

“재미는 무슨.. 지금 죽을 맛이야.”

“뭐 재미있게 놀았다고 얼굴에 쓰여 있구만 뭘.”

“에이 그냥 그랬어. 지금 총지배인님 오셨어. 이거 먼저 빨리 좀 해줘. 어서 먹여서 보내야지.”

“아 진짜. 그 인간은 여기 있는 것으로 좀 시키라고 그래. 무슨 마를 갈아달라고 하냐. 집에 가서 쳐 먹든가 하지.”

“누가 아니래. 빨리 좀 부탁해.”

“알았어.”

잠시 후, 먹기 좋게 데워진 크루아상과 김 가루가 뿌려진 마를 가지고 성진이 총지배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총지배인이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어제 무슨 일 있었나?”

“네? 아닙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 얼굴들이 왜 전부 저모양인가?”

“좀 피곤 한가 봅니다.”

“단체예약도 없었는데 뭐가 피곤해.”

“네 뭐... 개인적으로 일이 있었나 봅니다.”

“음....”

총지배인은 이미 눈치를 챈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고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어제 말한 면접 말이야, 전화로 보고 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총지배인은 무뚝뚝한 표정을 한 채, 홀 중앙을 가로질러 가다가 중간에 스탠바이를 하고 있던 캡틴을 불렀다.

“야. 가만히만 서 있지 말고, 손님한테 가서 필요한 거 없나 살펴봐. 저 손님 지금 식사 다 했잖아. 디저트 물어보라고!”

“네. 알겠습니다.”

총지배인은 고개를 돌려서 성진을 바라보았다.

“지배인. 직원들 서비스 교육은 주기적으로 하고 있나?”

“네 하고 있습니다. 교육시간에 참고해서 철저히 교육시키겠습니다.”

“쯧쯧..”

총지배인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차더니 카운트 데스크에 서있는 진이한테 다가갔다.

“자네는 화장이 너무 진해. 고쳐!”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네.”

총지배인의 호통에 나름 당당했던 진이마저 진땀을 흘리며 다급하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레스토랑에 들어왔을 때 보다 더 굳어진 표정의 총지배인은 엘리베이터에 이르자 성진을 바라보았다.

“술 먹는 건 좋은데 사고 나지 않게 잘해. 사고 나면 지배인 니 책임이야. 알았어?”

“네..”

“애들 돌아가면서 쉬도록 해줘. 저 꼴로 무슨 서비스를 한다고. 쯧쯧..”

“네 감사합니다.”

“수고해.”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총지배인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성진도 한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놓았고, 다른 직원들도 모두 베버리지 바에 모여서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다들 피곤할 텐데 손님 오는 거 보면서 돌아가며 백사이드에서 눈 좀 붙여라. 프런트 데스크에 김 과장님한테만 들키지 말고.”

성진이 뜻하지 않은 선심 쓰자 다들 기뻐하며 누가 먼저 쉬러 갈지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위태위태한 오전근무가 마무리되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교대로 식사를 마치고 직원들은 각자 숙소로 가서 남은 숙취를 쪽잠으로 해소했다. 오후가 되자 직원들은 어느 정도 숙취도 풀리고 정신이 돌아왔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해장하러 어디를 갈지 고민하는 등 다시 저녁에 모이자는 이야기로 들썩 거렸다. 직원들의 야단법석과는 다르게 성진은 베버리지 바에 기댄 채,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듯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배인님. 연회실로 가보세요. 면접자가 왔습니다. 그런데 여자던데요. 여자면 티오가 안 나서 케쉬어는 아닐 텐데.. 웨이트리스 쪽인가?”

데스크에 있던 캐쉬어 진이가 엄지손가락을 연신 등 뒤로 가리키며 성진에게 재촉했다. 

“그래 알았어.”

성진은 연회실로 가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앉았던 여성이 일어나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성진도 목례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네 반갑습니다. 식음료 지배인 박 성진이라고 합니다. 여기 명함..”

성진은 인사를 하며 얼굴을 살펴봤다. 체형은 그다지 크지 않은 아담한 체구였으며, 살짝 어깨 아래로 떨어지는 약간 긴 머리의 헤어스타일이었고, 하얀 블라우스 위에 커피색 헤링본 재킷과 아이보리 색 스커트를 입고 있는 모습이 단정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전체적인 체격은 균형 잡힌 체격이었다. 식음료부에서 일을 하려면 웨이트리스 같은 경우, 음식을 트레이 위에 얹은 채 서빙을 해야 하기에 어느 정도 체격을 봐야 했다. 물론 평소 개인위생에 대한 습관도 어느 정도 눈으로 평가를 해야 했다.

“이력서 가지고 오셨죠? 좀 볼까요?”

“네. 여기 있습니다.”

성진은 이력서를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름은 이 연희. 나이는 서른하나. 호텔 경력은 1급 호텔 커피숍 근무 5년. 나이나 경력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정도였으며 무난했다.

“주로 커피숍에만 계셨네요? 양식당이나 연회부에서는 안 해 보셨나요?”

“네..”

“음.. 여기는 양식당이지만 한식도 하고, 가끔 단체예약이 들어오면 여기서 단체 손님도 받아요. 그래서 사각 트레이에 뚝배기 같은 무거운 기물도 다뤄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급여와 근무조건을 알고 싶어요.”

성진은 급여, 근무시간, 사규등과 교대 근무에 대해서 알려주었고, 연희는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음, 커피숍 근무는 해보셨으니까 커피숍 지원 같은 건 문제가 안 될 듯하고, 언제부터 출근가능 하신가요?”

“내일부터 가능합니다.”

“내일이나 그 이후 아무 때나 가능하시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저, 혹시 채용여부는 언제쯤 알 수 있을까요?”

“음.. 늦어도 내일 오후까지는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성진은 계단으로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채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총지배인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서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낯설지만 처음 본 사람 같지 않았고, 오히려 익숙한 느낌으로 신비스러움 마저 들었다. 잠시 멍한 채로 넋을 놓고 있던 성진은 유부남 주제에 별생각을 다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총지배인님에게 전화하기 위해서 사무실로 향했다.  

이전 03화 릴리트 호텔을 떠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